1945년 8월 6일 오전 8시15분 일본 히로시마에 미군 B-29 전폭기가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에서 14만명, 사흘 뒤 나가사키에서 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현장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찾아간다. 일본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한 뒤 27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방문해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참배하기로 했다. 미국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이다. 일본은 크게 환영하며 벌써 아베 총리의 ‘진주만 답방’ 의사를 밝히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입성 후 줄곧 ‘핵무기 없는 세상’을 외쳐 왔다. 임기를 마치기 전에 세계의 유일한 피폭 현장에서 이 메시지를 역설하려 한다. 하지만 이 행보는 오독(誤讀)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백악관은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을 발표하며 “원폭 투하를 사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과는 아니라고 일부러 강조해야 할 만큼 이 이벤트는 일본이 ‘피해자’의 자리에 서는 모양새가 됐다. 일본 언론은 “양국에 박힌 역사의 가시를 빼는 일”이라고 대서특필했고, 미국 언론은 “많은 일본인이 방문 자체를 사과로 해석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히로시마 이벤트를 과거사 정리의 자리로 여긴다면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채 역사책의 한 장을 찢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원폭이 투하되기까지 일본은 수십년간 ‘가해자’였다. 제국주의 야욕을 앞세워 주변국을 침략했고, 식민지배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으며, 강제징용자와 위안부 등 무고한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줬다. 그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대신 부정하고 왜곡해 왔다. 그러면서 지난 7년간 오바마의 히로시마행을 줄기차게 설득한 건 ‘정리하고 싶은 과거사’만 정리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히로시마 이벤트 이후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가 한층 노골화될 가능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는 뜻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집권 직후부터 집요한 대미 외교를 벌였다. 중국과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미·일동맹에 올인했다. 역대 최상의 미·일 관계를 등에 업고 평화헌법 해석을 수정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 한국과는 지루한 줄다리기를 고집한 끝에 위안부 합의를 끌어냈고, 이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을 성사시키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제 미·일의 보조는 더욱 밀착될 것이다. 동북아 외교에서, 북한을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에서 한국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일본이 미국이란 힘을 이용해 과거사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둔갑하려는 상황을 우리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곳이 외교 무대다. 그런 상황에 충분히 대응하려면 우리의 외교 역량은 한참 더 강화돼야 한다.
[사설] 오바마가 히로시마에서 사과하지 않는다지만
입력 2016-05-11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