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성질환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당장 지원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 2005년 환경부의 ‘환경보건 정책 10개년 종합계획’이라는 정책 연구를 담당한 환경부 관계자의 말이다. 환경 문제를 피피엠(ppm)이라는 농도 단위로만 보던 시각을 바꿔 건강의 눈으로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환경보건 정책 수립 초기의 일이다. 아토피 피부질환이나 천식의 발생 원인이 환경오염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병의 질환자 모두를 환경 피해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때문에 환경 문제로 인한 건강 피해가 확인되면 적극 치료하고 보상해서 환경보건 정책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올들어 검찰의 수사를 계기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갑자기 재조명되고 있다. 옥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소비자 수백 명을 죽게 한 기업을 처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총선기간 내내 가습기 살균제가 선거 이슈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치권이 청문회와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적극 제기하고 있다. 올 들어 피해자 신고 접수조차 중단했던 환경부는 정부 책임론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지난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판정 기준과 지원 범위를 확대하고, 살(殺)생물제 규제법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정부·여당은 이 문제를 총괄하는 단위를 환경부에서 총리실로 격상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2011년 이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미 총리실에 태스크포스(TF)를 두고 피해 대책과 유사한 문제의 예방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었다. 여러 부처가 관련된 사안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이후 총리실의 TF가 단 한 차례도 관련 회의를 열고 피해대책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밝혀졌다.
그동안 환경부의 반응은 이랬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환경 문제가 아니다. 제품의 하자 문제다’, ‘가습기 살균제 건강 피해는 환경성질환이 아니다’, ‘복지부가 하던 일을 환경부가 뒤처리하란 말이냐’, ‘법적 근거가 없어 지원할 수 없다’, ‘제품이 처음 개발되던 시기의 과학적 수준으로 유해 여부를 알기 어려웠다’.
2005년 한 명의 환경성질환자라도 나오면 치료하고 지원하겠다고 했던 그 환경부의 자세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가습기 살균제 제품의 판매와 관리를 책임지고 심지어 KC 마크를 부여했던 산업자원부와 기술표준원은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해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총리실이 부처 간 업무 조정과 총괄 역할을 잘 해낼 것으로 기대하기는 무리다.
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함께 2013년 1월 금융감독원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었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자의 인수위원회가 이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할 민생 문제로 다뤄줄 것을 요구하며 당선자 앞으로 공문을 보냈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박 대통령은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국무회의에서 “철저히 조사하라”고 처음 언급했다.
환경부 장관을 비롯해 문제를 키운 부처의 책임자들을 문책해야 한다. 후속대책은 총리에게 맡길 게 아니라 박 대통령이 진두지휘해야 한다. 이번 사태는 화학물질 남용, 생활용품 제조·판매 과정에서의 안전장치 문제, 피해발생 후 배상 대책과 원인자에 대한 책임을 제도화하는 과제 등을 부각시켰다. 또한 피부 노출이나 마실 때 안전하더라도 호흡하면 전혀 다른 건강 영향이 나타날 수 있음이 드러났으므로 화학물질을 사용할 경우 용도가 달라지면 안전점검을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관련 제도가 정비돼야 한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시사풍향계-최예용]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문제 키웠다
입력 2016-05-11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