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권 모씨(30)는 요즘 이미지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에 시 올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맘에 드는 시구절을 손 글씨로 쓴 뒤 사진으로 찍어 올리면 댓글이 수북하게 오르기 때문이다.
시가 팔리기 시작했다. ‘문학이 죽었다’는 시대라지만 외면 받는 소설을 비웃듯 시 시장이 꿈틀거린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등 SNS 문화가 확산하며 사진, 영상 이미지에 곁들이기 편한 짧은 콘텐츠로서 시가 각광받는 것이다. TV문학프로그램의 위력, 영화 ‘동주’ 효과까지 겹쳐 시너지를 내고 있다.
10일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 24일까지의 시 분야 도서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5.3% 늘었다. 지난해는 전체 도서 베스트셀러 200위 안에 시집은 1권도 포함되지 않았다. 올 들어서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5위), 김소월의 ‘진달래꽃’(54위), 백석의 ‘사슴’(113위) 등 초판본 시리즈 3권과 정재찬의 ‘시를 잊은 그대에게’(86위·휴머니스트) 등 총 4권이 한꺼번에 200위 안에 진입했다.
한양대 국어교육학과 정재찬 교수가 쓴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이공계 학생을 대상으로 한 현대시 강의다. 이 책의 인기는 시가 젊은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임을 입증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학 출판사들도 미소 짓고 있다. 문학과지성사는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등 스테디셀러 시집이 탄력을 받는 가운데, 특히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등단한 지 14년 만의 첫 시집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지난해 말 케이블채널 tvN의 프로그램 ‘비밀독서단’에 소개된 게 판매 기폭제가 됐다.
20대 후반, 30대 초반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조명 받는 것도 하나의 흐름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는 이이체 시집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유희경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등이 약진하고 있다. 민음사 역시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서윤후 시집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등 30대들의 첫 시집이 이례적으로 중쇄를 했다. SNS에서의 왕성한 활동 덕분에 ‘아이돌 시인’이라는 닉네임까지 얻은 황인찬(28)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는 지난해 9월 출간 이후 시로서는 드물게 1만부 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창비에서는 ‘희망버스’ 기획자로 잘 알려진 송경동 시인의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가 지난 2월 출간 후 증쇄를 거듭하며 4000부가 팔렸다. ‘헬 조선’의 분위기와 맞물려 시집이 인기를 끈 것으로 분석이 된다.
민음사 문학 담당 서효인 팀장은 “기성 시인들은 SNS에서의 시 소비 방식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와 달리 젊은 시인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고, 이것이 오프라인에서의 시집 판매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스24 김성광 문학 담당 MD는 “방송에서의 도서 노출은 새롭지 않은 현상이지만 시를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면서 “SNS에는 짧은 콘텐츠인 시 형식이 부합하다는 점도 시의 인기가 지속될 수 있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소설이 외면 받는 시대… 詩가 팔리기 시작했다
입력 2016-05-10 2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