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30주년이라는 기념비적 해에 치러진 필리핀 3대 선거(대선·총선·지방 선거)가 ‘막말 대통령’ 탄생과 ‘족벌정치’로 마무리됐다. 장기간 지속된 경제난과 갈수록 흉악해져가는 강력범죄에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이 ‘특단의 개혁’을 기대하고 극단적인 대통령과 ‘독재에의 향수’를 택한 것이다.
9일 필리핀 7107개 섬 전역의 3만6000개 투표소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는 강경 발언과 여성 비하 등으로 ‘필리핀판 트럼프’로 불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71) 다바오 시장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마닐라타임스가 전했다. 부통령 선거에서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1917∼1989)의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봉봉(58) 상원의원이 사실상 당선을 확정했다.
대통령, 부통령을 비롯해 상원의원 12명, 하원의원 297명, 주지사 81명 등 공직자 1만8000여명을 선출하는 대형 이벤트였던 이번 선거는 마침 마르코스를 몰아낸 ‘피플파워 혁명’ 30주년에 치러지면서 필리핀 정치 발전을 가늠해볼 기회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오히려 ‘퇴행적인 결과’가 나왔다. 가장 큰 문제점은 각종 막말과 강경 발언을 일삼아온 인물의 대통령 당선이다. 선거 초반에는 군소 후보에 불과했던 두테르테는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 “범죄자 10만명을 죽여 물고기밥으로 만들겠다”는 강경한 발언으로 인기가 급상승했다.
실제 그는 남부 다바오시에서 22년간 시장으로 지내며 마약상 같은 강력범의 즉결 처형을 시행하는 등 초법적 범죄 소탕을 벌였다. 결국 다바오는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가 됐고 그는 ‘징벌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때문에 그의 강경 발언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AP통신은 “가난과 범죄, 부패, 내전에 지친 필리핀 유권자들이 급진적인 변화를 택했다”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두테르테의 여성 비하 발언이나 인격적 자질 문제도 결국 선거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족벌정치나 대중적 인기에 의존한 정치도 두드러졌다. 여성 대선 후보였던 그레이스 포(47) 상원의원은 정계에 입문한 지 3년도 안 됐지만 필리핀의 국민배우였던 양아버지 페르디난드 포의 후광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었다.
다른 대선 후보인 마누엘 로하스(58) 전 내무장관 역시 전직 대통령의 손자로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BBC는 극심한 빈곤과 빈부격차 등 필리핀의 ‘진짜 문제’를 이런 후진적 정치권이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독재자의 아들’ 봉봉이 부통령에 당선된 것 역시 필리핀의 정치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는 아버지가 독재자로 군림하던 시절 인권유린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오히려 “독재시대가 지금보다 나은 황금기였다”며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자”고 주장했다.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86) 하원의원과 딸 이미(60) 일로코스노르테 주지사 모두 3연임이 유력하다. 미국 CNN방송은 이 같은 결과는 “민주체제에서의 요식 체계에 지쳐 독재의 향수에 빠져드는 유권자들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선거 이틀 전 시장 후보가 살해되고 선거 당일 총격전이 벌어져 최소 22명이 목숨을 잃는 등 치안도 극히 불안했던 선거로 기록됐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
‘필리핀의 트럼프’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 확실… 이멜다도 하원의원 3선 성공
입력 2016-05-09 18:32 수정 2016-05-10 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