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카터, 한·미 정상회담에 김일성 초대… 3자 회담·평화협정 구상

입력 2016-05-11 04:02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한 다음 날인 197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동두천 미 제2사단 영내에서 장병들과 함께 조깅하는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정부 기록 사진집’ 발췌

지미 카터 대통령은 시대를 잘 만난 정치인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정치에 대한 혐오가 극에 달했다. 미 국민들은 1976년 대선에서 무명의 카터를 선택했다. 워싱턴 냄새가 가장 적게 났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기존 정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인권 정책이었다. 아시아에 대한 군사개입 축소를 외치며 주한미군 철수를 꼭 집었다. 이들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혔다.

카터, “박정희가 이렇게 나오면 주한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겠소”

당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미국 여론은 주한미군 철수 반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한·미 당국자들은 이 문제를 의제에 넣지 않거나, 넣더라도 짧게 다루기로 합의했다. 두 대통령의 말다툼으로 힘겹게 호전시킨 상황이 도루묵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참모들의 건의를 무시했다. 확대 정상회담이 시작되자마자 무려 45분 동안 철군 반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카터가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고 말겠소”라는 메모를 배석했던 국무·국방장관에게 보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한·미 정상회담에 김일성 초대하려고 했던 카터

카터 대통령은 78년 9월 17일에 체결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고무돼 있었다. 그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를 초대해 평화협정 체결을 중재했다. 카터는 남북한도 미국 중재로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위기가 사라져 주한미군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카터는 북한 김일성을 초대해 한·미 정상회담을 남북·미 3자 회담으로 확대하려고 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는 이 지시를 받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고 돈 오버도퍼는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 썼다.

카터가 이상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 당국자들은 가능성도 거의 없지만 설령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하더라도 북한은 언제든 이를 휴지처럼 버리고 군사도발을 감행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박정희, 민주화 조치에 “가능한 한 최선” 단서 달아

박 대통령에게 면박 당했다고 느낀 카터는 정상회담을 마치고 주한 미국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삿대질을 해가며 글라이스틴 대사를 박살냈다. 미국 대통령이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차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궁금히 여긴 사람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이 중엔 최규하 국무총리도 있었다. 정차된 수행 차량 행렬이 대로변에 길게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방한은 미국 전략대로 끝났다.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는 대가로 한국으로부터 방위비 인상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 받았다. 다만 미국은 박 대통령이 민주화 조치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단서를 다는 것마저 막지는 못했다.

카터 대선 패배로 주한미군 철수 ‘없던 일’ 돼

카터는 79년 6월 29일 방한해 7월 1일 떠났다. 그는 김포공항에 환송 나온 박 대통령에게 “교회에 나가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권했다고 글라이스틴은 회고록에 썼다.

카터 행정부는 방한 3주 뒤인 7월 20일 “주한미군 철수를 81년까지 연기한다”고 밝혔다. 철수 포기가 아니라 ‘연기’로 절충점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카터가 80년 대선에서 참패하며 없던 일이 됐다.

블루밍턴(미국 인디애나)=하윤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