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新냉전’ 물밑서도 불붙었다
입력 2016-05-09 19:06
냉전 회귀 조짐을 보이는 미국과 러시아의 군비 경쟁이 심상치 않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고조된 양국 갈등이 지상과 공중에 이어 바다 밑 잠수함 경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은 최근 길이 40m의 최첨단 무인 선박을 선보였다. ‘바다의 사냥꾼’이라 명명된 이 선박은 ‘잠수함 킬러’다. 승조원이 전혀 탑승하지 않는 바다의 사냥꾼은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했다. 한 번 출항하면 70∼90일 동안 기항하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 12노트(시속 22㎞)의 속도로 달리면 1만9000㎞를 순항할 수 있다. 대양을 넘나드는 작전 반경이다. 미 해군이 출현 빈도가 높아진 러시아 잠수함에 대응하기 위해 전략무기로 개발한 스텔스(레이더 추적 회피) 선박이다.
미 해군은 또 냉전 이후 2006년 철수한 아이슬란드의 케플라비크 기지의 격납고를 수리해 P-8A 포세이돈 해상 순찰기를 운용할 준비를 마쳤다. P-8A는 북해를 돌아다니는 러시아 잠수함을 집중 감시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이뿐 아니다. 미 해군은 토마호크 미사일 탑재 능력을 3배 향상시켜 한꺼번에 40기를 탑재할 수 있는 버지니아급 공격형 잠수함 9척을 발주했다. 미 국방부는 잠수함 전력 향상을 위해 향후 5년간 81억 달러(약 9조2380억원)의 예산을 미 의회에 요청했다.
미국이 이토록 잠수함과 잠수함 대응 전력 향상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것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러시아의 잠수함 활동 때문이다.
잠수함 전력을 수적으로 비교하면 아직 러시아는 미국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러시아는 공격형 잠수함 45척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25대가 핵잠수함이고 나머지 20대는 디젤엔진으로 움직인다. 서방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잠수함 중 상당수가 노후화돼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잠수함은 절반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잠수함 53대를 보유하고 있는데 전부 핵추진 잠수함이다. 이 중 교대임무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잠수함을 제외하더라도 3분의 1인 17∼18대는 항상 전 세계 바다 밑에서 활동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에 뒤지는 잠수함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소형 전술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무인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이 분야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는 것으로 미 정보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러시아는 잠수함을 대양으로 진출시키기 위한 항구를 확보하는 데에도 혈안이 돼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발트해와 북해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으나 최근 들어서는 지중해와 대서양 쪽으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는 시리아의 타르투스 항구 1곳에 불과했지만 키프로스와 이집트, 리비아의 항구를 빌려 러시아의 잠수함 기지로 활용하는 계획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주둔 미 해군은 러시아 잠수함을 감시하기 위해 냉전 이후 처음으로 지난달 20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있는 유럽작전본부에서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마크 퍼거슨 유럽 주둔 미 해군사령관은 “러시아의 잠수함 출현이 지난해 가을 기준 전년도보다 50% 늘어났다”며 “러시아의 신형 잠수함들은 스텔스 기능이 더욱 뛰어나고 첨단무기 체계를 장착했으며, 작전반경이 훨씬 넓어졌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잠수함 출현에 긴장한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과 독일, 노르웨이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은 러시아의 해저 진출에 맞서 신형 잠수함을 구입하거나 구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등은 북해에서 함정과 잠수함을 동원한 ‘다이내믹 몽구스’ 훈련을 계획 중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러시아 핵추진 잠수함에 유독 긴장하는 것은 한 번 출항하고 나면 추적이 쉽지 않고, 단독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유사시 러시아 잠수함이 전 세계 해저케이블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인터넷과 국제금융을 연결하는 해저케이블이 파괴되면 세계 경제는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물밑에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17일에는 러시아 수호이(SU)-27 전투기가 발트해 상공에서 정찰 비행 중인 미 공군의 RC-135 위쪽으로 근접 비행한 적도 있었다. 동체를 뒤집는 곡예비행을 하면서 10m 가까이 접근하면서 위협했다. 러시아 전투기는 같은 달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폴란드 인근 발트해 공해상에서 구축함 도널드쿡(DDG75)에도 수차례 근접 비행했다. 미 해군 구축함은 러시아 SU-24 전투기 1대가 9m 거리까지 접근하자 경고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SU-24 전투기가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행한 것으로 드러나자 격추하지는 않았다.
육상에서도 미국은 러시아의 군사활동 강화에 맞서 폴란드와 발트 3국에 2개 대대 병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뿐 아니라 나토 회원국 중 독일과 영국도 1개 대대 병력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국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도발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게 아니라고 판단하고 2017 회계연도의 ‘유럽 수호 이니셔티브(European Reassurance Initiative)’ 예산을 전년도 7억8900만 달러에서 4배 이상 증강한 34억 달러(3조9000억원)를 책정하고 승인을 의회에 요청해 놓았다. 러시아의 도발로부터 유럽을 방어하는 데 투입되는 ERI 예산은 2015 회계연도 1억 달러에서 출발했으나 불과 2년 만에 34배로 껑충 뛰었다. ERI의 일환으로 병력 4000∼5000명으로 구성된 전투여단도 유럽에 추가 배치된다. 이는 미국이 유사시 분쟁지역에 투입하기 위해 본토에 두고 있는 예비 병력을 유럽으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하는 러시아는 최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를 무력화하는 극초음속 미사일을 개발했다.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는 비행속도가 마하 6 이상인 극초음 순항미사일 지르콘(3M22)의 시험을 내년까지 완료하고 내후년부터 본격 생산해 실전 배치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지상발사장을 이용해 차세대 잠수함 미사일 지르콘을 시험발사했다고 발표했다. 지르콘 순항미사일은 2018년 재취역하는 키로프급 핵추진 순양함 나이모프 제독함에 처음 장착될 예정이다. 지르콘 순항미사일은 사거리가 250마일(402㎞)로 러시아의 기존 초음속 대함미사일 그라니트의 사거리 390마일(628㎞)에 비하면 짧다. 그러나 속도 면에서는 현재 미사일 방어기술로는 요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러시아는 순양함 탑재용 외에도 전략폭격기와 잠수함 발사용 지르콘 생산도 추진하기로 했다. 2022년에는 차세대 최신 잠수함인 허스키급 핵잠수함에 극초음속 순항미사일인 지르콘이 장착될 예정이다.
미국도 2004년부터 극초음속 비행체 개발에 나섰지만 이미 생산 단계에 접어든 러시아에 비하면 크게 뒤졌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미국과 러시아가 이토록 군비경쟁을 벌이면서 갈등을 빚는 배경에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반발한 미국과 서방의 경제 제재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다 국제유가 하락이 지속되자 원유 판매 수익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다. 경제난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가 군사적 모험주의를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새로운 냉전이 시작됐다’며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있다.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지난 2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러시아의 공격적 행위가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든, 미국과 동등하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것이든, 자칫 우리를 또 다른 냉전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는 지난 2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콘퍼런스 연설에서 “미국과 나토가 냉전시기 대결구도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지금이 1962년인지 2016년인지 헷갈린다”며 “우리는 새로운 냉전시대에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옌스 슈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은 메드베데프 총리를 면전에서 반박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의 안보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며 “러시아가 과거 냉전시기에도 용인하기 힘든 수단을 동원해 주변국을 위협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이 냉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위험한 수위로 치닫고 있다고 진단했다. 나토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터프츠대 플레처스쿨 학장은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은 냉전 이후 20년 만에 최고 수위에 달했다”면서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냉전식 사고를 회피하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스타프리디스 교수는 미국이 러시아를 다루는 전략으로 제재와 대화의 병행을 제시했다. 그는 “미국은 러시아의 도발에 독자적 대응이 아닌 나토의 일원으로 대처하고,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종전 등에 합의할 때까지 경제 제재를 유지하되, 테러대책과 해적소탕 등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할 수 있는 방안도 함께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 매체 포린폴리시는 “미국은 러시아가 느끼는 안보 위협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밀밸리평화연구소 레이철 마셜 연구원의 글을 소개하기도 했다. 마셜 연구원은 “러시아가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이다 와해된 소련의 전철을 밟을지는 의문”이라며 “미국과 러시아는 상대를 여러 차례 파괴할 수 있는 무기 개발에 수십억 달러를 쓸 게 아니라 극단적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퇴치와 시리아 내전 종식 등을 위해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