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이영섭(53·사진)의 신작 ‘어린왕자’를 보자. 돌조각이기는 한데 곳곳에 유리나 도자기 파편이 박혀 있다. 얼굴에는 흙까지 묻어있다. 땅 속에서 금방 꺼낸 유물 같다.
그의 작업은 독특하다. 돌을 깨거나 깎아내지 않는다. 만들고 싶은 형상을 땅에 그린 다음 흙을 파낸 구덩이에 시멘트와 오브제를 넣는다. 굳어지기를 기다린 다음 발굴하듯 꺼내 흙을 툴툴 털어내면 작품이 완성된다.
땅을 거푸집 삼는 그의 ‘발굴’ 작업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강원대 사범대를 졸업한 그는 미술교사로 발령이 났으나 3주 만에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자신만의 작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1986년 고향인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 근처에서 유물 발굴 현장을 우연히 지켜보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테라코타로 형상을 빚었어요. 매끈하게 잘 나왔죠. 그런데 잘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창조란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개척하는 것이잖아요. 아무리 잘 만든 조각도 결국에는 깨질 텐데, 오래된 도자기 파편들을 활용한다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달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품이 제대로 나오기까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깨버린 것도 부지기수고요. 혼합재료의 정확한 비율을 찾는 데만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이렇게 만든 작품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성곡미술관 앞에 있는 갤러리마리에서 6월 15일까지 선보인다. ‘시간을 머금은 순수’라는 타이틀로 어린왕자, 노트북, 모자상, 의자, 곰인형, 성경 등 38점을 내놓았다. 작품마다 조선시대 분청이나 백자 파편을 넣어 한국의 미를 살렸다. 작가는 “문화재 발굴이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꺼내는 것이라면 내 작업은 현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02-730-7300).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오래된 도자기 파편들은 현재·과거 잇는 전달자”
입력 2016-05-09 19:41 수정 2016-05-09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