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 로힝야族 이름 쓰지 말라”…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실망스런 행보

입력 2016-05-08 18:15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일이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다.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로힝야로 부르지 못하게 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민주 정부의 실질적 지도자와 외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70·사진) 여사가 직접 미국 정부에 로힝야 표현 사용 자제를 요구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번 논란은 지난달 19일 미얀마 북서부 해상에서 발생한 선박 전복사고로 로힝야족 난민 22명이 사망한 일에 대해 현지 미국대사관이 ‘로힝야’ 표현이 들어간 조의 성명을 표명한 게 발단이 됐다. 극우 성향 불교단체인 ‘마바타’는 지난달 27일 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로힝야라는 고유 명칭 대신 ‘벵갈리’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벵갈리는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온 불법 이민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미국이 로힝야라는 표현을 고수하려면 그들을 아예 데려가라”고 촉구했다.

미얀마 외무부도 “로힝야는 미얀마 정부가 인정한 135개 소수민족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로힝야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미얀마의 민족 화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스콧 마시엘 주미얀마 미국대사에게 전했다. 외무부 당국자는 이번 요구가 수치 장관의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미얀마 내 100만명이 넘는 로힝야족은 약 1000년 전 이슬람 상인으로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등에 건너와 살기 시작했지만 미얀마 정부는 이들을 불법이민자로 간주해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또 거주지를 북서부 라카인주 일대로 제한하고 공교육과 보건 등의 혜택을 주지 않고 있다.

1962년부터 53년간 미얀마를 통치한 군부가 물러나고 지난 3월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각에서는 로힝야족의 처우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특히 수치 여사가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만큼 종교의 차이를 넘어 보편적인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로힝야 지도자인 우 아웅윈은 “수치 여사는 미얀마에서의 로힝야족의 권리는 물론 존재 자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아왔다”고 비판했다. 지난 3월에는 수치 여사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 후 자신을 인터뷰한 진행자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터뜨렸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그녀를 둘러싼 실망스러운 뉴스가 잇따르고 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