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양병기] 평화협정 논의할 때 아니다

입력 2016-05-06 18:22

지난 1월 4차 핵실험을 실시한 직후 북한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북한의 이런 주장은 처음이 아니지만 주변국의 입장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어 우려스럽다. 중국이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 추진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했고,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 또한 병행 논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더구나 최근 한 언론사에서 20대 국회의원 당선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204명 중 절반에 가까운 93명이 ‘비핵화-평화협정의 논의의 병행’을 찬성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6·25전쟁이 남긴 상처를 봉합했던 현재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해소된 상태로 바꾸자는 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북한의 주장에는 간과해서는 안 될 함정이 있다.

우선 북한이 내세우는 것은 ‘북·미 간’ 평화협정이다. 북한은 1960년대까지는 ‘남북 간’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으나, 1973년부터 줄기차게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1973년 1월 27일 남·북 베트남과 미국이 참가한 가운데 베트남 전쟁을 종결지은 파리 평화협정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이때 북베트남은 ‘주월미군의 철수’를 요구했고, 당사국들이 이를 받아들여 같은 해 3월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북베트남은 1975년 월등한 군사력을 가지고 남베트남을 침공해 50여일 만에 남베트남을 점령하였다. 결국 북한이 내세우는 북·미 평화협정 저변에는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 관계를 해체시키기 위한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둘째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압박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핵 능력 고도화’를 위한 시간벌기 전략의 일환이다. 북한에 가해진 유엔 안보리 제재 2270호는 역대 최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는 제재 완화의 명분을 주고, 국제사회에는 평화적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대북제재 국면을 전환할 수 있는 돌파구로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주장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과거 1990년대 후반 평화협정 체결을 포함한 남·북·미·중의 4자 회담이 6차에 걸쳐 진행됐으나 협정체결의 당사자 문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북한에 핵 개발을 위한 시간만 벌어주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국민은 먼저 ‘평화협정’ 체결은 남북 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2007년 발표된 10·4남북정상선언에 평화협정 협상에 남한이 당사자로 참여하는 것을 공식화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도 남북 주도의 평화협정 체결이 한반도에서 평화 정착의 궁극적인 해결책임을 주지시켜야 한다. 둘째로 ‘핵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은 우리 자신과 후손의 안전을 북한의 ‘선의’에 맡겨버리는 위험한 선택임을 인식해야 한다. 가까이는 ‘월남’의 사례가 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는 불가하며, 북한이 진정성 있는 비핵화 의지를 가시화하는 것이 평화협정 논의의 선행조건이 돼야 한다.

북한은 5차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 치명적인 무기를 틀어쥐고서 우리에게 대화 테이블로 나오라고 협박하는 꼴이다. 북한이 핵을 손에 쥐고 있는 한 평화협정 논의에 참여해선 안 된다. 지금은 안보리 결의와 대북제재 이행에 집중할 때다.

양병기 청주대 정치안보국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