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총재 “국책은행 지원, 한은 출자보다 대출이 적합”

입력 2016-05-05 18:53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자본확충 방안과 관련해 한은의 직접 출자보다는 채권을 담보로 한 대출이 적합하다고 밝혔다. 이런 방안이 현실화되면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조성한 ‘자본확충펀드’와 유사한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의 발언은 기업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중앙은행이 개입하더라도 담보 없이 발권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론을 강조한 것으로, 한은의 직접 출자를 원하는 정부와 여전히 시각차를 드러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고 있는 ‘아세안+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 중인 이 총재는 4일(현지시간) 기자간담회를 열고 “(발권력을 통한 기업 구조조정 지원은) 국가 자원을 중앙은행이 배분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이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이 납득돼야 하고 투입한 돈의 손실이 최소화돼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라며 “손실 최소화 원칙에서 보면 출자보다 대출이 원칙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이어 “출자 방식을 100%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타당성이 있다면 그것도 가능하다”면서도 “중앙은행이 손해를 보면서 국가 자원을 배분할 권한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 자금을 직접 출자하는 것은 손실 위험을 한은이 직접 감수해야 해 부담스럽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특정 기업에 무리한 혜택을 준다는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이 총재는 한은이 지원금을 회수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인 2009년 운영된 자본확충펀드를 사례로 제시했다. 자본확충펀드는 이 총재가 통화담당 부총재보로 재직할 때 직접 구상한 것으로,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고 실물경제 지원 여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와 한은이 20조원 규모로 조성했다. 자본확충펀드는 은행이 발행한 우선주나 신종자본증권, 후순위채 등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은행 자본력을 높여줬다.

한은 입장에서는 회수가 보장되는 담보를 확보하면서 은행의 건전성을 높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현재 산업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 비율은 14.28%, 수출입은행은 10.11% 수준이다. 조선·해운사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책은행의 건전성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

이 총재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사례도 거론하며 중앙은행의 원칙을 강조했다. 당시 연준이 대형 보험사 AIG에 1125억 달러를 출자가 아닌 대출 방식으로 지원하면서 AIG와 자회사 전 자산에 대한 담보권을 설정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앞서 지난달 19일 열린 한은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한국형 양적완화’와 관련해 금통위원 간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 금통위원은 “중앙은행이 발행시장에서 채권을 직접 인수하는 것은 과거처럼 유통시장 자체가 없거나 신용경색으로 시장 소화가 어려운 경우에 한해 용인되는 것”이라며 한은이 산은의 산업금융채권이나 주택금융공사의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형태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다른 금통위원은 “기본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한은이 할 수 있는 부분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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