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함께한 지 천일을 기념하며 그가 준 램프. ‘언제나 변함없이 너와 함께’라는 글귀가 무색할 만큼, 세 번째 가을날 우리는 남이 되었습니다. 이별은 아프지만 사랑의 흔적이 담긴 추억까지 아프지 않도록 이 램프가 환하게 켜지길 바랍니다.”(선휘♡혜경 ‘천일의 램프’)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물품들이 전시장에 진열됐다. 제주시 산지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Ⅱ에서 5일 개관한 ‘실연(失戀)에 관한 박물관’에는 갖가지 사연이 담긴 100여점이 선보였다. 헤어지면 편지나 선물 등을 태우는 게 보통이지만 이를 박물관에 모았다. 전시품들은 연인, 가족, 친구, 애견, 자신과의 헤어짐에 대해 각각의 얘기를 들려준다.
실연과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이 기증한 물품으로 구성되는 ‘실연박물관’은 2006년 크로아티아에서 시작됐다. 조각가 드라젠 그루비시치와 영화 프로듀서 올링카 비스티카는 사랑을 키워가다 헤어지게 됐다. 두 사람은 추억이 담긴 물건을 정리할 아이디어로 전시를 고안해냈다.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빌려 연 전시는 “깨진 관계에 대한 향수의 완벽한 공간” “사랑과 유대에 대한 갈망의 전당”이라는 평가와 함께 화제를 모았고 세계 35개 도시 투어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전시를 아시아에서는 처음 기획한 아리리오뮤지엄은 지난 2월 한 달 동안 다양한 사연과 물품을 기증받았다. 한 여성은 코란도 지프를 기증했다. 7년간 타고 다니면서 아들딸 낳고 잘 살았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체취와 흔적이 남아있는 물품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내놓은 것이다. 이 기증품은 ‘아빠차를 부탁해’라는 제목으로 작품이 됐다.
제주 4·3사건 당시 끌려간 남편에게 아내가 건네준 빵 한 조각, 아픈 애견의 꼬리를 집어넣기 위해 구멍을 낸 기저귀, 생일날 연인에게서 받은 감동의 반찬통,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야 내 지난 사랑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는 애틋한 사연을 적은 러브레터 등이 전시장에 나왔다.
힘들었던 고교생활과 이별했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책 ‘수학의 정석’,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이 묻어나는 청춘필통, 취재용으로 발급 받은 프레스카드도 있다. 열기구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게 꿈이었던 한 남자가 내놓은 트로피는 ‘무지개 한 조각’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무지개를 좇아 돌아다니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자신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영광의 트로피를 버리듯이 눕혀 놓았다.
이들 기증품과 사연은 9월 25일까지 이곳에서 전시된 후 크로아티아 ‘실연박물관’의 컬렉션으로 영구 소장될 예정이다. 제주 ‘실연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한 그루비시치와 비스티카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숨어 있는 모텔을 리모델링한 전시공간에 기증품들이 놓여 의미가 남다르다”며 “이별의 아픔을 관객들과 공유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주=글·사진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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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5-05 1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