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손성호] 부모노릇 참 어렵다

입력 2016-05-05 21:03

나는 그리 좋은 아빠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는 훌륭한 아버지가 계신다. ‘내 아버지’와 ‘아버지로서의 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면 앞으로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를 체득할 사이도 없이 아이가 훌쩍훌쩍 자라고 있다. 시간이 없다. 아이가 성장해가면서 점점 행복보다 불행의 심상에 익숙해져 감을 느낀다. 그렇게 마주하는 현실이 더 힘겹고 냉혹해지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목사 아빠를 둔 아이는 신앙적으로도 적잖이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좋은 부모이길 원치 않는 이가 어디 있을까마는, 이 시대와 세태가 ‘다 그렇지만은 않음’을 확인시켜 준다. 평생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정년퇴임하신 장로님은 늘 말씀하신다. ‘문제아이가 아니라 문제부모’라고. 이쯤에서 물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서 진정 행복한가.’ ‘자녀가 생긴 뒤 우리는 삶에 더 충실해졌는가.’ 신앙을 가진 부모라면 질문 하나가 더해진다. ‘하나님께로부터 자녀를 위탁받은 다음,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신앙적으로 성숙되었는가.’

좋은 부모, 좋은 가정의 예와 조언은 셀 수 없이 많다. ‘좋은 부모가 되는 10계명’ ‘신앙적 자녀양육을 위한 7계명’ 정보는 이미 넘쳐흐른다. 동네교회마다 ‘어머니 기도회’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그런데 교회에선 날이 갈수록 자녀세대의 신앙과 다음세대의 교회를 두고 한숨이 커지고 있다.

어떤 방면에서든 위기는 성찰과 도약의 기회다. 가정의 위기, 교회의 위기는 더 ‘본질적인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구약성경에는 잠언 말고는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말씀이 거의 없다. 신약성경에 와서야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 어떻게 부모노릇을 온전히 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자녀를 위한 권면에는 축복의 말씀을 더해놓았다(엡 6:1∼3). 반면 부모를 위한 권면에서는 매우 단호한 어조를 사용한다(엡 6:4, 골 3:21). 헤아려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더욱 주목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부모노릇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부모노릇은 참 어렵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쌓인다 해서 익숙해지거나, 능숙해지지 않는다. 도리어 포기하고 비우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성경말씀을 모아 말하자면 부모들은 마땅히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또 자녀가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부모라 해서 함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말아야 하고, 스스로 자유를 묶어 성숙한 인격과 삶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부모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자녀)을 위한 일, 다음세대와 관련된 문제이며, 그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책임이 수반되는 일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스승이었지만, 저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은 마치 부모와 같으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셨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거룩한가, 거룩하지 않은가’가 아니다. ‘저들을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분별하였는가’이다. 어른으로서 하지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자녀가 생긴 그날로부터 우리는 자신을 분별하고, 절제해야 할 책임도 갖게 됐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그날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한 날이다.

‘분별’, 그 처음이 ‘인내와 절제’라면 다음은 ‘원칙과 표준’이다. 도덕과 윤리, 가정생활, 신앙생활, 옮고 그름, 그리고 이상과 가치에 있어 부부는 반드시 ‘합의된 표준’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엄격히 실행해야 한다. 자녀가 나빠지고 어긋나는 경우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부모가 잘못 이끌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녀는 ‘인생의 성적표’이자 ‘신앙의 성적표’이다.

더 늦기 전에, ‘부모노릇’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 바꿀 것은 바꾸고 세울 것은 세워야겠다. 가정의 달이다. 더 없이 좋은 기회다.

손성호 목사 (서울 초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