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국가의 잃어버린 부] 검은돈 천국의 7600조원… 잃어버린 세금 170조원

입력 2016-05-05 19:43 수정 2016-05-05 21:24
해외로 자산을 빼돌려 세금을 피하는 조세 도피 문제는 그동안 작은 문제로 취급돼 왔다. 극소수 자산가들의 일탈 정도로 여겨져 왔다. 국내에서도 탐사보도전문매체 ‘뉴스타파’의 보도로 몇 차례 조세 도피자 명단이 공개되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관심을 끌진 못했다. 시민들은 물론이고 정책 담당자나 경제학자들조차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지 못하고 있다. 조세 도피 문제는 알 수도 없고, 없어질 수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돼 왔다.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가브리엘 주크만(30·UC버클리대 경제학과 조교수)은 이 어려운 문제를 파고들어 주목할만한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2013년 현재 전 세계 가계 금융자산의 8%가 조세 도피처에 들어가 있다. 이는 역사상 최대 수치다. 유럽연합(EU)의 경우에는 이 비율이 무려 12%에 육박한다.”

‘가계 금융자산’이라 함은 부채를 제외하고 전 세계의 개인이 보유한 은행예금과 적금, 주식과 채권, 투자펀드와 생명보험증서의 총합이다. 8%는 금액으로 5조8000억 유로(약 7600조원)나 된다. 주크만은 조세 도피처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운용방식 등을 연구하고, 스위스국립은행(BNS), 프랑스의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등의 통계를 이용해 이 수치를 추정해냈다.

‘8%’ ‘5조8000억 유로’라는 수치는 굉장히 중요하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파리경제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수치에 대해 “조세 도피처에 보유된 전 세계 가계 금융자산액과 경제 제재 산정액을 최초로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조세 도피처에 은닉된 금융자산이 추정되면 ‘국가의 잃어버린 부’, 즉 조세 포탈액을 계산해내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주크만은 조세 도피처의 비밀계좌가 유발한 연간 세수 손실액을 1300억 유로(약 170조원)로 추산한다. 이자, 배당금 등에 대한 소득세 포탈 800억 유로, 양도세 포탈 450억 유로, 재산세 포탈50억 유로 등이다. 이것은 개인 자본의 최근 10년간 평균 수익률과 현행 세율등을 토대로 계산해낸 것이다.

조세 도피처에 은닉된 자산에 대한 조세가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유럽에서 비밀계좌로 가능해진 조세 포탈액은 2013년 현재 500억 유로(약 65조원)에 달한다. 그 중 프랑스가 제일 심각한데, 3600억 유로의 프랑스 돈이 조세 도피처에 예치돼 있고, 이로 인한 조세 포탈액은 170억 유로에 달한다. 이 세금이 환수될 경우, 프랑스의 공공부채를 2013년 말 국내총생산(GDP)의 94% 수준에서 70%로 급격히 낮출 수 있다.

“조세 포탈과의 전쟁이 필요한 이유는, 이 전쟁을 통해 대다수 납세자가 내고 있는 세금을 낮추고, 동시에 공공 재정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밀계좌를 일망타진함으로써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긴축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주크만은 조세 도피처에 은닉된 자산을 찾아내 과세한다면 전 세계 주요 국가의 최대 고민인 불평등과 재정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전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해법으로 매력적인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조세 도피처는 갈수록 악화되는 불평등과 재정위기의 숨겨진 원인이기도 하다.

좋다. 조세 도피를 해결하자. 그런데 어떻게? 그 악명 높은 스위스의 은행들을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 자산가들은 언제나 또 다른 은닉 방법을 찾아내지 않겠는가? 주크만은 토지를 파악하여 부동산등기부를 만들 듯,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유가증권의 실소유주를 파악하여 등기하는 세계금융등기부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는 “국제통화기금은 단기간에 이 등기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적 수단들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세계금융등기부가 만들어지기만 하면 모든 자본에 대한 과세가 가능해지고, 자본에 대한 과세는 조세 포탈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계가 논의하고 있는 은행 데이터의 의무적 교환도 강화돼야 한다. 또 조세 도피처들을 상대로 해당국이 외국에 입힌 손실액과 똑같은 액수를 그 나라에 과세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고, 시민들이 각국 정부를 압박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조세 도피처에 은닉된 자산을 처음으로 추정해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시킨다. 조세 도피처 문제는 세계 경제 위기의 핵심 원인이고, 불평등과 재정위기를 해결할 유력한 대안이며, 무엇보다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는 걸 알려준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