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서희석] 집단적 소비자 피해의 구제시스템

입력 2016-05-04 18:48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의 기자회견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독립적 기구를 구성’해 포괄적으로 피해를 보상하겠다는 부분이었다. 외부 인사로 위원회 조직을 만들어 피해 보상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생각해보면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설치된 독립적 기구가 다름 아닌 법원이다. 사법제도를 통한 피해구제 시스템이 정비된 국가였다면 피해자들은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 분쟁 해결을 도모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옥시는 법원을 통한 손해배상청구의 대상(피고)에서 자발적으로 독립적 기구를 통한 피해 보상을 시현(示顯)하는 주체로 입장이 바뀌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집단적 소비자 피해의 구제 시스템을 정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한 시스템은 ‘소비자 집단소송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

우선 소비자 집단소송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 이 제도는 공통의 원인으로 피해를 입은 다수의 소비자를 대표하는 자나 소비자단체 등이 소송을 수행해 판결이 확정되면 그 효력이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에게도 미치는 특수한 민사소송제도다. 미국에서 발달했지만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계 국가뿐만 아니라 브라질 이스라엘 스웨덴 노르웨이 등에서 도입하고 있고 최근에는 프랑스와 일본도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 관련 분야에서만 존재하지만 그 경험을 살려 소비자 피해 일반을 대상으로 한 제도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제19대 국회에는 이미 7개의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고 95명의 의원들이 서명한 상태다. 그럼에도 입법이 안 되는 이유는 특히 산업계로부터 남소(濫訴) 가능성과 산업경쟁력 저하를 이유로 하는 강력한 반대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이 시행된 지 11년이 넘었지만 현재까지 제기된 소송건수는 불과 몇 건에 불과하다. 이것은 법 시행 이후에 기업들이 스스로 위법행위를 방지하고자 노력해 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기업의 경제활동을 방해해 산업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인지는 미국의 예에서 쉽게 그 답을 추측해볼 수 있다. 오히려 스스로 법을 지키고 소비자 이익을 중시하는 기업만이 경쟁력을 갖춰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두 반대논리 모두 결정적 논거가 될 수 없다.

다음으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손해의 전부를 배상하는 전보배상주의가 손해배상의 대원칙이지만 악의적이고 반사회적 기업에 대하여는 실제 손해액의 몇 배를 배상토록 하는 것이 효과적 제재 수단이 될 수 있다. 주로 영미법계 국가에서 인정하고 있고 최근 중국에서도 이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도 몇몇 영역에서 선별적으로 도입했다(개인정보보호법, 신용정보보호법, 하도급거래공정화법 등에서의 3배 배상제도). 필자는 이번 사건 같이 소비자의 생명·신체상의 피해를 야기하거나 기타 악성이 큰 사업자의 행위에 대하여는 소비자 집단소송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도입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제도의 도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법부의 인식 전환이다. 소비자분쟁은 대등한 당사자를 전제로 하는 일반 민사분쟁과는 구조적으로 다르다. 정보가 사업자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소비자가 사업자의 과실이나 인과관계를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입증 책임의 과감한 전환과 적극적인 손해배상액의 인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인식 전환에 입각한 ‘사법(司法) 적극주의’ 구현과 함께 두 제도가 도입된다면 비로소 집단적 소비자 피해의 구제 시스템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우리나라 소비자보호법제 정비를 위한 좋은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서희석 (소비자법학회장·부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