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장애인주일이 되면 모든 사랑부(장애인부서) 친구들이 온 성도들의 박수갈채 속에 강단 앞으로 입장한다. 다양한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큰 은혜와 도전을 받는다. 분명 육의 눈으로는 그들의 입장이 무질서해 보이지만 영의 눈을 가진 우리가 어찌 그 모습을 무질서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가관(可觀)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으로 볼 때 분명 어떤 자연경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관(壯觀)일 것이다.
예전에 비하면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국가에서, 민간단체에서, 가정에서 그 역할들을 충실히 감당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교회도 장애인 사역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복지만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교회는 예배공동체로서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지붕에서 흙가루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사람들이 중풍 환자를 고치기 위해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내려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잠시 말씀 선포를 멈추고 그를 치유해 주셨다. 주위에 있는 수많은 비장애인들보다 한 명의 장애인을 향해 더 큰 사랑과 애정 그리고 치유의 갈망을 품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장애인 사역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다수인 비장애인 성도들을 위한 사역이 대부분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장애인 사역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일시적인 긍휼과 자비의 감정이 아닌 교회가 마땅히 예산과 시간과 관심을 쏟고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바로 장애인 사역이다.
나아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편함으로 인해 소외되거나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가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도움만 받으며 고립된 존재로만 살도록 부르심 받은 게 아니라 영혼 구원의 사명을 위해 부르신 하나님의 형상임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교회의 성숙은 ‘얼마나 연약한 영혼들과 함께할 수 있느냐’로 판가름 난다. 예수님의 삶이 연약한 자와 함께하신 삶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교회가 장애인들과 함께할 수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장애를 가진 교회’가 아닐까. 누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장애인이 아니라 ‘예비 장애인’이다. 따라서 ‘앞으로’가 아니라 ‘지금’, ‘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라는 입장에 서서 장애인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장애인 사역들을 감당할 때 세상에서의 무질서가 우리에게는 질서가 되며, 예배의 방해가 아니라 예배의 은혜가 될 것이며, 세상에서 가관이라 부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고의 장관이 될 것이다.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수님 닮은 한국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장애인 사역을 통해 한국교회의 거룩성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이건영 목사 (인천제2교회)
[시온의 소리-이건영] 가관인가, 장관인가
입력 2016-05-04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