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4일 영국 레스터 킹파워스타디움. 크리스털 팰리스와 2015-2016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10라운드를 앞두고 레스터시티의 라커룸으로 들어온 백발의 노장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무실점으로 이기면 너희들한테 피자 쏜다.”
동기부여를 위한 제안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했다. 선수들은 한바탕 껄껄 웃었고, 얼마뒤 시합은 1대 0 레스터시티의 승리였다. 리그 개막 10경기 만에 처음 나온 클린시트(무실점 승리)였다. 그런데 영국 축구 전문 언론들은 레스터시티의 승리를 조롱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감독이 사주는 피자를 먹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경기를 치렀다”는 것이었다. 레스터시티가 시즌 초반부터 선두를 질주했음에도 영국 축구팬과 언론들의 태도는 이처럼 ‘반짝 돌풍’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인구 28만명의 소도시. 잉글랜드 중부 한 가운데 위치해 신발 공장과 면직물 공장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레스터시티에서 지역 연고팀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상위 성적을 거둔 일은 전혀 없었다. 사양 산업으로 낙인찍힌 신발과 면직물 제조업으로 인해 안 그래도 지역경제가 형편없이 쪼그라든 이 도시에서 올해 축구팀이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봉 총액 4820만 파운드(804억여원), 2014-2015 시즌 성적 리그 14위, 1884년 창단 이래 84년 동안 2부 리그와 그보다 더 하위 리그만 전전했던 팀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도박사들이 예측한 우승 확률도 0.02%였다. 우승한다는 게 거의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레스터시티가 우승할 원동력은 진짜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적시장에서도 스타플레이어는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다. 제이미 바디(29), 리야드 마레즈(25)처럼 2부리그 시절부터 뛰던 경험조차 일천한 ‘미생’들로 가득했다.
그런데 레스터시티는 꺼져버릴 것 같던 돌풍을 ‘태풍’으로 만들었다. 시즌이 초반에 이어 중반으로, 중반에 이어 종반으로 넘어갈수록 프리미어리그 1위라는 순위표는 더 견고해져간 것이다. 맨체스터시티(맨시티), 아스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리버풀, 첼시 등 ‘빅5’의 견제도, 토트넘 핫스퍼와 같은 신흥 강호의 위협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 폐막을 2경기 남긴 3일 레스터시티는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유일한 경쟁자였던 2위 토트넘이 첼시와의 36라운드 원정경기에서 2대 2로 비겨 우승 승점 확보에 실패하자 그대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창단 132년 만에 처음으로 프리미어리그를 정복한 것이다.
단연 ‘미생들의 반란’ 주인공은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이탈리아) 감독이다. 지금까지 1부리그 우승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라니에리 감독은 ‘우승 청부사’보다 ‘리빌딩 전문가’다. 강등된 팀을 상위 리그로 끌어올리는 재주는 있었지만, 빅 클럽들의 틈새에서 우승을 일군 이력은 없었다.
시즌 개막을 한 달 앞둔 지난해 7월 부임한 라니에리는 현실적인 전술을 선택해 레스터시티를 재건했다. 그리고 ‘미생’들은 ‘완생’으로 바뀌었다. 바디와 마레즈, 직접 영입한 일본인 공격수 오카자키 신지(30), 미드필더 대니얼 드링크워터(26)는 모두 그가 창조해낸 선수들이다.
소박함과 진솔함, 선수에게 먼저 다가가는 말솜씨로 라니에리는 레스터시티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부터 파악했다. 방어와 역습 위주의 전술을 펼쳤고, 조직력과 전술 완성도는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강팀을 만나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투지를 선수들에게 불어넣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후 지금까지 리그를 주름잡던 명문 팀들은 전부 레스터시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정경기에서도 레스터시티는 강팀들을 이겼다. 바디와 마레즈는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전에 이미 리그 최우수선수(MVP)와 영국축구기자협회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다. 레스터시티는 리그우승 보너스 86억원과 함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했다. 우승 확정 뒤 라니에리 감독은 “선수들이 하루하루 발전하길 원했을 뿐”이라고 했다. “선수들이 다행히 잘 따라왔고 정신력을 잘 버텼다”면서 “그저 나는 실용적인 사람”이라고도 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관련기사 보기]
0.02% ‘흙수저’의 반란… 레스터시티, 창단 132년만에 우승
입력 2016-05-0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