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부산은 홍콩과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기독교가 유입되는 관문 역할을 했다. 1876년 개항 이전까지 기독교와의 접촉은 주로 중국대륙, 만주를 거쳐 의주 등 이북지방 이뤄졌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기독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영국성공회, 미국 북장로교, 호주장로회를 중심으로 일본을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다. 근대식 병원과 우편제도, 전기 전화의 설치, 수도 시설 등 개화문물이 서울보다 앞서 유입됐다. 개화 물결과 함께 각 선교단체들이 부산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복음의 씨앗도 뿌려지게 됐다.
◇부산·경남 최초 복음전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부산·경남에 최초로 복음 전파를 시도했던 선교기관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로 알렌이 입국하기 1년 전인 1883년 7월부터 1886년 말까지 부산을 비롯한 남쪽 지역에 약 2000권의 복음서를 반포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1882년 중국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 1000권씩을 일본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인 톰슨에게 보내 조선에 반포했다. 일본주재 성서공회는 1883년 일본인 나가사카를 부산에 파견, 1886년까지 성경반포사업을 펼쳤다. 1883년 톰슨과 감리교 교인 스가노 부부, 미우라 등은 부산에서 성경반포 활동을 했고 이는 부산과 경남에서의 최초 기독교와의 접촉이었다.
◇부산·경남 최초 복음 사역자 ‘월푸’=1884년 10월 부산에서 처음으로 복음 사역자로 활동한 존 월푸는 영국교회선교회(CMS) 소속 중국 선교사로 54년간 중국에서 활동했다. 월푸는 건강이 악화돼 요양차 일본을 거쳐 부산을 방문했다가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선교지인 중국 푸조로 돌아가 남지나 선교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885년 11월 2명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다시 부산을 찾았다.
월푸가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는 국내외에 널리 소개됐고 호주의 데이비스 목사가 조선 선교의 길에 오르게 한 계기가 됐다.
◇부산 최초 개신교 선교사 ‘게일’=부산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게일은 캐나다 토론토대를 졸업하고 학생기독교청년회(YMCA) 소속으로 1888년 12월 12일 부산에 도착해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어 공부와 선교연구를 했다. 1890년 캐나다 선교부 해체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적하고 1929년 6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선교사, 언어학자, 저술가, 번역가, 역사가, 민속학자, 성경번역가, 목회자로 활동했다.
특히 그가 번역한 ‘텬로역정’은 우리말로 번역된 최초의 서양문학작품이다. 그는 최초의 한영사전인 ‘한영자전’(1897, 1911, 1930)도 편찬했다.
성경번역가로 많은 영향을 끼친 그는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이었던 레이놀드와 함께 1892년부터 1925년까지 33년간 성경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내한 초기 사도행전을 번역한 후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서 요한일서를 번역했고 1925년 사역본 성경인 ‘신역 신구약전서’를 출판했다.
부산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한 하디는 1903년부터 1910년까지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의 와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부흥의 인물이면서 부산에서 거주한 첫 서양인 선교사 가족이다. 1890년 토론토 의대 졸업과 동시에 의사가 된 하디는 게일과 함께 같은 해 9월 30일 한국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아내 마틸다 켈리와 함께 1891년 4월부터 6개월 간 서울에서 제중원의 임시원장으로 활동하다 부산 항만 전용의사와 선박 검역관으로 활동했다.
◇호주 최초 선교사 ‘데이비스’=호주장로회는 미국 북장로교의 첫 한국 선교사인 알렌이 입국한 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헨리 데이비스 목사와 메리 데이비스를 한국으로 보냈다.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은 인정했으나 부정적 시각이 많아 데이비스를 선교사로 인준했지만 재정 지원과 한국 선교부 설치계획은 없었다. 데이비스는 청년연합회(YMFU) 후원으로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고 40일간의 항해 후 같은 해 10월 2일 부산항에 입항했다.
그는 당초 서울에서 선교를 시작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선교사가 전혀 없는 지역인 부산으로 이주를 결심했다. 서울을 떠나 경기·충청·경상지역 등 500㎞에 이르는 답사여행을 마치고 20여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폐렴과 천연두에 걸렸고 부산에 도착한 지 하루 만인 1890년 4월 5일,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부산 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의 죽음으로 호주장로교회의 부산·경남 선교가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청년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해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보내기로 결의했고,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전도회연합회도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청년연합회 소속 멕카이 목사 부부와 여전도회연합회 소속 미혼 여선교사 등 5명은 제2진 선교사로 1891년 10월 내한했고 호주장로교회는 해방 전까지 78명의 선교사를 한국으로 보냈다. 특히 데이비스의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와 진 데이비스는 부산과 경남에서 의료와 교육 선교사로 활동했다.
◇엘라딩기념선교회 부산 선교=독립선교단체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1895년 폴링 목사 부부와 미혼 여성인 아멘다 가르더라인을 제1진 선교사로 한국으로 보냈다.
이들은 부산에서 선교사업을 벌이다 선교사가 없는 공주 강계 홍성 등 충청지역에서 활동하다 재정난으로 1900년 한국에서 철수했다. 펜위크가 이 사업을 인계받아 1906년 ‘대한기독교회’ 조직을 만들고 이후 ‘동아기독교’로 개칭해 해방 후 한국침례교회의 모체가 됐다.
◇부산·경남 복음화 운동 기초 ‘미국 북장로교’=호주 첫 선교사였던 데이비스 이후 미국 북장로교는 첫 선교사로 윌리엄 베어드 부부를 1892년 3월 부산으로 보냈고 선교부지를 매입해 북장로교 선교부의 부산거점을 마련했다.
베어드 부부는 기독교 신자의 가정을 보호하고 후원했으며 지역 주민과의 유대 강화, 복음전파, 문맹퇴치운동, 경상도 지역의 순회 전도여행 등을 펼쳤다. 특히 베어드 부부는 연중 7개월 동안 집을 떠나 있을 만큼 개척 선교에 열중했고 후일 대구선교지부를 열었다.
1891년부터 1895년까지 4년간 부산에서 활동한 그는 부산에서의 북장로교 선교활동의 시원이 됐고 부산지방 기독교운동의 기원이 됐다. 호주선교들과 함께 부산·경남지방 기독교 형성에 초석이 됐다.
또 미국 북장로교는 베어드 이후 브라운 의사, 어빈 의사, 아담스, 로스 목사, 사이드보탐 목사, 스미스 목사, 윈 목사, 밀즈 등이 부산에서 복음전파, 의료선교 등의 활동을 했다. 어을빈 의원 개원, 계명대 설립, 부산제일영도교회 등의 발전에 기여하며 오늘날의 부산·경남지역 복음화 운동의 기초가 됐다.
창원=이영재 기자 yj3119@kmib.co.kr
기독교 관문 부산, 1880년대 복음으로 깨어났다
입력 2016-05-03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