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일 “구조조정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책은행 자본 확충과 관련해 그의 발언에 미묘한 변화가 드러나고 있다. 정부가 연일 한은의 역할론을 강조하자 발권력 동원을 놓고 대립각을 세웠던 정부와 한은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듯하다. 한·중·일 및 아세안+3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 참석차 독일을 방문하고 있는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 총재가 현지에서 구조조정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면서도 한은의 자존심을 지켜줄 묘수를 찾아낼지 관심사다.
이 총재는 2일 독일로 출국하기 직전 한은 집행간부회의를 열고 “한은은 기업 구조조정이 우리 경제의 매우 중요한 과제이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며 “기업 구조조정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으니 한은의 역할 수행 방안에 대해 다시 한번 철저히 점검해 달라”고 말했다.
정부는 발권력 동원에 미온적인 한은을 거듭 몰아붙이는 모양새다. 기재부 최상목 1차관 역시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입을 맞춘 듯 “정부와 한은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책은행 자본확충 협의체’ 첫 회의는 4일 열린다. 정부가 내심 최선으로 꼽는 방안은 국책은행에 대한 한은의 직접 출자다. 한은이 돈을 찍어서 국책은행에 지원을 하자는 것이다.
산업은행에 대한 한은의 출자는 현행법으론 불가능하다. 돈을 찍어내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에 전문가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구조조정 등 특정 분야의 정책금융에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할 경우 특혜 시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다. 인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야당은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검토하겠다는 정부 입장에 독립성 침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 총재 역시 과거 한은이 돈을 찍어 재정지원을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이 “한은이 산은에 3조4000억원을 대출해 줬는데 발권력 남용 아니냐”고 지적하자 이 총재는 “한은보다 정부 재정이 담당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은이 산업금융채권을 발행시장에서 매입하는 방안도 검토되지만 역시 법 개정 혹은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결국 정부가 국회 동의나 법 개정 절차를 피해 한은이 자체적으로 동원 가능한 지원방안을 사용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이투자증권 서향미 연구원은 “한은이 구조조정 과정에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만으로 가능한 금융중개지원대출 활용 및 수출입은행에 대한 출자 등의 수단이 주목된다”고 내다봤다.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통한 재정지원 등 정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동부증권 문홍철 연구원은 “산업구조조정 대응을 한은이 나서서 하는 건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국회 동의 절차를 밟아서 추경을 편성하는 게 제대로 된 길”이라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정부와 발권력 동원 놓고 대립각 세웠던 이주열 한은 총재 “구조조정 과정서 필요한 역할할 것”
입력 2016-05-03 04:36 수정 2016-05-03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