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정부 입’만 바라보는 구조조정… 부실기업 연명 우려

입력 2016-05-03 04:34

바다의 산업 해운·조선업 구조조정이 산으로 가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를 견딜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고통을 분담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을 모색하기보다는 부실기업의 연명을 위해 돈을 찍어내고 정부가 채권단을 동원해 직접 기업의 생사를 판가름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특정 산업과 기업을 위한 특혜성 지원만 부각되면서 구조조정을 위해 필요한 대책은 미뤄지고 불필요한 논란만 커지는 상황이다.

◇죽인다, 살린다 엇갈린 신호=기획재정부 최상목 1차관은 2일 “구조조정은 손실 부담”이라며 “고통 분담이 있고 자구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통 분담은 부실기업의 대주주와 거래 당사자,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 직원의 순으로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은 모두 정부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산업은행 소유인 대우조선해양은 물론이고, 산은과 수출입은행이 주채권자로 있는 한진해운, 현대상선, 한진중공업 등도 사실상 정부가 명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한입으로 두말을 해야 하는 처지다. 두 해운사의 생존이 걸린 용선료(화물선 임대료) 협상 테이블을 향해선 “100% 타결되지 않으면 법정관리로 갈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고 있고, 앞으로의 생사를 가르게 될 해운사 동맹(얼라이언스)에는 “회사를 정상화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는 이른바 ‘컴포트 레터(Comfort letter)’를 전달했다.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있는 금융위원회는 애초 “시장 자율적인 구조조정이 원칙”이라고 내세웠지만 고통 분담보다 정부의 자금 지원이 더 부각되면서 스텝이 엉킨 것이다.

정부의 엇갈린 신호는 시장에도 혼란을 주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현대상선의 용선료 협상이 2주밖에 남지 않았고, 한진해운이 오는 19일 채무 조정을 위한 사채권자 집회를 여는 등 고통 분담이 구체적으로 시작돼야 할 시점인데도 이해당사자들은 우선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한지,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 나은지 가늠을 못하고 있다. 자칫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다 공멸하는 치킨게임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변질된 양적완화 논란=청와대가 앞장서서 제기한 선별적 양적완화 논란은 구조조정을 정치 사안으로 만들어 버렸다.

현재 논의되는 선별적 양적완화는 미국 유럽 일본 등 기축통화국이 진행하는 경기부양 차원이 아니라 특정 업종과 기업에 대한 선별적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보편적 통화정책을 추구해야 하는 중앙은행의 역할과는 거리가 있다.

정부가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재정 지원보다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압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소야대 국회의 논란을 피하고 정부의 행정력만으로 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IBK투자증권은 지난달 29일 보고서에서 “이는 (경기부양을 위한) 양적완화라기보다는 개발연대 시절에 활용되던 정책금융의 부활로 보는 것이 맞다”며 “경제 체질이 자연스럽게 조정되고 회복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정부나 중앙은행의 조치에 더 귀를 기울이는 행태를 반복하는 조급증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은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지만 이주열 총재가 급히 불끄기에 나서면서 이제는 한은의 독립성까지 흔들리고 있다. 이 총재는 3일부터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과 나란히 아시아개발은행 총회에 참석하게 된다. 4일 한은은 기재부, 금융위와 함께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 협의체에 참석한다.

◇실업대책·산업대책 실종=이 와중에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가 맡아야 할 본연의 역할인 실업 대책과 산업 대책은 뒷전으로 밀렸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것이 거의 전부다. 이는 오히려 대기업-고연봉자인 대형 조선업체 직원들에게만 일시적으로 특혜를 주겠다는 셈이어서 근본적인 대책과는 거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조선·해운업과 함께 5대 공급과잉업종, 신용등급 C·D의 이른바 좀비기업 등 정부가 제시한 3트랙의 구조조정이 모두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실업 대책과 새로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신산업 창출 대책이 필요하다.

지난달 26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설명한 구조조정 대책에서는 실업급여 확대 방안과 함께 이른바 노동개혁 4대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29일의 언론사 부장단 간담회에서는 실업 대책이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성급한 양적완화 논란 때문에 정작 절실한 실업 대책은 뒷전으로 밀린 것이다.

김지방 백상진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