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 황금알 낳는 거위

입력 2016-05-03 04:00
레스터시티의 수비수 웨스 모건(앞쪽)이 1일(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 올드트래퍼드에서 열린 2015-2016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36라운드 원정경기에서 팀이 0-1로 뒤져 있던 전반 17분 다니엘 드링크워터의 프리킥 때 헤딩슛으로 동점골을 터뜨린 뒤 기뻐하고 있다. 레스터시티는 핵심 공격수 제이미 바디가 출전 금지 징계로 결장한 가운데 후반 41분 드링크워터가 수비 과정에서 반칙을 범해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1대 1로 비겼다. AP뉴시스
영국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쇠락하는 대영제국’이란 단어다. 18∼20세기 초 세계를 지배하던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후 한 번 기가 꺾였고, 1970년대를 시작으로 사양산업의 원조국가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금융과 관광, 스포츠산업으로 다시 활황을 누리게 됐다. 그 대표 상품이 바로 영국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1부 리그)’다. 영국을 방문한 관광객 43명 중 한 명꼴로 경기장을 찾는다. 무려 한 해 80만명의 외국 관광객이 프리미어리그 축구경기를 관전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프리미어리그가 영국의 히트상품이 됐을까?

영국 프로축구는 1888년 시작됐다. 세계 최초의 프로리그였다. 1888년 9월 8일 12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최초의 시즌이 시작됐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탓에 1919년까지 리그가 중단됐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2차 세계대전으로 다시 리그는 폐쇄됐다. 이후 리그 참가 팀 수가 12개에서 88개로 늘어났고, 리그도 상위 리그와 몇 개의 하위 리그로 나뉘어졌다. 이후 잉글랜드 클럽들은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후반 잉글랜드 리그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경기장은 낡았고, 재정 상황은 불황에 빠진 영국 경제만큼이나 ‘파산 직전’이었다.

특히 훌리건들이 문제였다. 1985년 5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잉글랜드)의 과격한 팬들이 유벤투스(이탈리아) 팬을 공격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때문에 잉글랜드 클럽들은 5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이들 팀들의 경기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89년 또 비극이 발생했다. 셰필드 힐스브러 스타디움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4강전에서 팬들이 엉켜 넘어지면서 96명이 압사했다.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축구 문화를 쇄신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경기력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당시 잉글랜드에선 ‘뻥 축구(킥 앤드 러시)’로 불리는 전술이 유행했다. 안개가 자주 끼고 비가 자주 와 그라운드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롱 킥으로 볼을 상대 진영으로 넘겨 버리고 빠른 선수들의 신체 능력을 활용해 골을 넣는 게 ‘뻥 축구’였고, 하류의 전술이었다.

이에 1992년 잉글랜드 1부 팀들은 새로운 리그(프리미어리그)를 창설했다. 프리미어리그는 20개 클럽이 주주로 있는 일종의 주식회사다. ‘주식회사 프리미어리그’는 축구문화 쇄신과 발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기존 체제에선 1∼4부 리그 92개 팀이 중계권료를 동일하게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축구협회(FA)에서 독립한 프리미어리그는 중계권과 후원사를 별도로 관리하며 부를 축적했고, 해외에서 스타들을 사들여 경쟁력을 높였다.

또 스타 마케팅을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갔다. 특히 금발의 ‘섹시 가이’ 데이비드 베컴(31·전 맨유)은 프리미어리그가 간절히 기다렸던 스타였다.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은 베컴의 헤어스타일을 흉내 냈다. 축구에 관심이 없는 여성들도 베컴에 열광했다. 베컴이 1999년 여성 팝그룹 ‘스파이스 걸스’의 빅토리아 애덤스와 결혼하자 베컴 신드롬은 정점에 달했다.

영국정부도 프리미어리그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겼다. 해외 축구 관광객 수를 늘리기 위해 프리미어리그와 파트너십을 맺기도 했다. 영국 관광청에 따르면 2014년 해외 관광객들이 축구를 보기 위해 지출한 금액은 6억 8400만 파운드(약 1조 1378억원)에 달했다. 축구를 본 관광객은 한 명당 855파운드(약 142만원)를 썼다. 축구를 보지 않은 관광객은 한 명당 628 파운드(약 104만원)만 지출했다.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은 지난해 ‘프리미어리그가 영국 경제에 미친 영향’이라는 흥미로운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3-2014 시즌 동안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20개 팀이 영국정부에 납부한 세금은 총 24억 파운드(약 4조원)에 달한다. 또 이 시즌 동안 프리미어리그 경기로 인해 총 10만 3354개의 일자리가 창출되었다고 한다.

프리미어리그의 경기력을 따지면 프리메라리가(스페인)나 분데스리가(독일)보다 더 좋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스포츠산업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프리미어리그는 세계 최고의 리그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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