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1980년 6월 군(軍)에 갔다. 당시 33개월 복무,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였지만 나는 신체검사를 겨우 통과했다. 내 몸무게는 47㎏이었고 2㎏만 더 빠졌더라면 면제될 뻔했다.
철모를 쓰니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가 작아 철모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군복이나 신발도 맞는 것이 거의 없었다. 허리 26인치에 신발사이즈 230㎝인 내게 군대 훈련은 너무 힘에 부쳤다.
자대배치를 받자 완전군장을 한 채 10㎞ 행군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우리 중대가 완주하지 못했다. 내가 낙오병이 된 것이다. 이후 내무반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 하루는 100㎞ ‘공지 작전’(공군과 지상군인 육군이 함께하는 작전) 행군을 했는데 20㎞ 지점에서 또 낙오됐다. 화가 난 고참이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때리면 더 못 가는데.’ 억울하고 눈이 뒤집혔다. 제대를 며칠 앞둔 고참에게 “같이 죽자”고 소리쳤다. 그랬더니 고참이 나를 업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래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고참의 뒤통수에 음식물을 토했다. 잠시 후 똥냄새가 자욱했다. 배 속에 있던 똥물이 입으로 역류한 것이다. 그리고는 기절했다. 3일 만에 눈을 떠보니 의무대였다. 링거를 맞고 한 달간 요양했다. 부대 복귀를 하니 우리 부대는 최전방으로 이동명령이 났다.
휴전선 철책 근무를 서니 북한군이 저 멀리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군이 남쪽으로 뿌린 전단(일명 삐라)을 보고 기겁했다. 거기에 떡하니 내 얼굴이 실려 있었다. 삐라에는 ‘못 먹고 굶주린 남조선 병사’라고 쓰여 있었다. 부대 내 윗분들은 “국가적인 망신”이라며 수군거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후방 신병교육대로 전출을 가게 됐다. 해프닝도 이런 해프닝이 없었다.
신병교육대에서는 중대장 당번병(비서)으로 근무했다. 또 에어로빅 조교로도 일했다. 에어로빅 조교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던 것이다. 당시 전군에 에어로빅 보급 열풍이 불었다.
2박3일 특별휴가 기간에 국민대 체육과 여학생에게 에어로빅을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춤을 잘 추었기 때문에 에어로빅 수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후 사단 에어로빅 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에어로빅 강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군 장교 사모와 신병들에게 에어로빅을 가르쳤다. 나는 모든 훈련과 사역에서 열외였다. 혼날 일도 혼나지 않았다. 한 번은 신병과 함께 건빵을 몰래 끓여 먹다가 대대장에게 들켰는데 중대장이 혼났다. 중대장은 대대장이 던진 재떨이에 맞았다. 하지만 대대장은 배영만은 혼내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사단 에어로빅 대회에 곧 출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대 내 보컬그룹과 문화선전대도 조직했다. 덕분에 포상휴가를 많이 갔다. 10번 정도, 군대생활 중 총 6개월가량 휴가를 간 것 같다.
어머니는 나의 잦은 휴가를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없는 살림에 왜 이렇게 휴가를 자주 오느냐. 그놈의 군대는 나라는 안 지키고 병사들을 왜 이리 집에 자주 보내는지. 차라리 방위병으로 가지 그랬냐.”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더니.’ 나의 국방부 시계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역경의 열매] 배영만 <3> 北 삐라에 내 얼굴이 ‘굶주린 남한병사’ 모델로
입력 2016-05-03 2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