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68> 조부의 風

입력 2016-05-02 18:22
그레고리 펙의 손자 이선 펙

신분이 세습되던 고대 중국에서는 무장이나 문사로 명성을 드높인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손자가 같은 분야에서 할아버지 못지않은 업적을 쌓거나 이름을 날릴 때 ‘조부(祖父)의 풍(風)이 있다’고 칭찬하곤 했다. 하기야 조부의 풍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게 무장과 문사들뿐일까. 다른 분야에도 할아버지를 빼닮았다는 말을 듣는 손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일전에 ‘대를 이은 배우들’에서 부자(父子) 배우 이야기를 했지만 손자가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조손(祖孫) 배우들도 있다. 할리우드의 전설 그레고리 펙과 그의 손자 이선 펙(30). 이선이 주연한 ‘에덴(Eden. 2015)’을 봤다. 그러나 이선은 상당히 잘생긴 젊은이지만 할아버지의 붕어빵은 아닐 뿐더러 할아버지가 그와 비슷한 연배에 이미 4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하고 빛나는 매력을 뽐냈던데 비하면 상대가 안 된다.

그레고리 펙 외에 할리우드의 전설급 스타를 할아버지로 둔 손자 배우들은 이렇다. 우선 클라크 제임스 게이블(28). ‘할리우드의 왕’ 클라크 게이블의 손자인 그는 굵은 눈썹에 가느다란 콧수염 등 그나마 할아버지와 외모가 비슷하다. 배우 겸 TV 쇼 호스트로 활동 중이다. 다음은 션 플린(27). 활극의 제왕이었던 에롤 플린의 외손자다. 역시 일세를 풍미한 핸섬보이였던 외조부를 닮아 미남이지만 자질은 아직 알 수 없다. 또 스티븐 R 맥퀸(28)도 있다. ‘킹 오브 쿨’ 스티브 맥퀸의 손자인 그는 아버지 채드 맥퀸도 배우로 활동했으나 존재감이 극히 미미했던 탓에 과연 아버지 실패를 설욕하고 할아버지에 필적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사실 손자 배우들은 대체로 아직 연륜이 일천한 탓에 섣불리 평가하기 힘들다. 게다가 스타의 자녀라면 연기력이나 재능을 검증받지 않아도 영화의 주연을 턱턱 꿰차는 우리나라와 달리 본인의 개성과 매력, 자질이 없으면 특별대우를 잘 해주지 않는 할리우드에서 쉽사리 할아버지처럼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앞으로 누가 톱스타가 돼 ‘과연 조부의 풍이 있다’는 찬사를 받을지 궁금해진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