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호(51)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와 부장판사 출신 최모(46·여) 변호사가 촉발한 ‘재판 로비 스캔들’의 이면에는 폐쇄적 보석(保釋) 제도가 있다. 정 대표는 ‘구치소 폭행’ 논란이 벌어지자 “최 변호사가 보석을 조건으로 총 50억원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공방은 의뢰인과 전관변호사 간에 이런 계약이 이뤄졌는지, 실제 재판부 청탁으로 이어졌는지로 번지고 있다.
구속된 ‘범털(돈·권력이 있는) 피고인’에게 보석을 거론하며 거액을 요구하는 것은 법조 브로커의 흔한 수법으로 알려져 있다. 인맥을 내세우면서 특정 변호사와 재판부의 친분을 과시하는 식이다. ‘은밀한 유혹’의 이면에는 보석 기준과 사유, 보석금 액수 등이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제도적 맹점이 깔려 있다.
결정문 달랑 하나…판사만 아는 ‘깜깜이 보석’
‘보석’은 재판을 성실히 받겠다는 조건으로 법원에 보증금을 내고 풀려나는 제도다. 형사소송법 제95조는 징역·금고 10년 이상의 죄를 지었거나 상습범일 때,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있을 때 등을 보석 불허(不許) 조건으로 규정한다. 허가가 아니라 불허 기준만 정해놓은 만큼 보석 결정은 사실상 재판부 재량에 달린 셈이다. 불허 기준에 해당되더라도 판사가 ‘보석의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직권으로 보석을 허가할 수 있다.
일선 판사들은 ‘피고인 건강 상태’ ‘양형’ 등이 주요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의 한 형사부 판사는 “실형이 예상될 경우 도주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보석을 기각한다”며 “집행유예 이하 가능성이 높으면 ‘미결구금’(판결 확정 전 수감) 일수가 늘어나므로 일반적으로 보석을 허가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통상의 보석 결정문에는 보석 허가 여부 외에 별도 사유가 기재되지 않는다. 판사 직권으로 허가해도 ‘형사소송법 제96조에 따라 상당한 이유가 있어 허가한다’고만 적는 식이다. ‘보석 결정 전 검사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조항도 있지만 검찰은 “보석은 전적으로 법원의 권한”이라는 입장이다.
보석금 액수에도 구체적 기준이 없다. 수도권 법원의 한 판사는 “재산 등에 따른 보석금의 명확한 기준은 없다”며 “과거 ‘어느 정도 재력을 가진 피고인이 얼마를 냈다’는 식으로 구전(口傳)돼온 것에 따라 정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법원통계월보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법원의 보석 허가율은 38%에 달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사유로, 얼마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다. 한 부장판사는 “보석 내용은 법원 전산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는다”며 “‘보고’가 없는 법원 특성상 언론 등이 주목하는 사안이 아니라면 사유 등은 해당 판사만이 알 것”이라고 말했다.
마당발 브로커 이씨, 檢 “계좌 추적 중”
검찰은 정 대표의 로비 창구 역할을 한 브로커 이모(56)씨의 주변 계좌를 추적 중인 것으로 1일 알려졌다. 이미 이씨는 출국금지 상태다. 그가 법조계를 비롯해 정·관계 등에 ‘발 넓히기’를 꾀한 정황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이씨는 지난해 3∼6월 한 언론사의 ‘최고경영자 과정’ 포럼에 등록했다. 2010년 설립된 중소기업 P사 회장 자격이었다. 포럼에는 법조계를 비롯해 정·재계 인사 등 51명이 참여했다.
이씨의 수상한 행적만큼이나 P사에 대해서도 의문이 커지고 있다. P사는 지난해 12월 회사 본점 소재 부동산이 경매에 넘어간 상황에서 이를 알리는 통지서를 받지 못했다. 사유는 이사불명이었다. 이사불명은 ‘수취인이 이사했는데 이사한 곳을 알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양민철 이경원 기자 listen@kmib.co.kr
브로커 작업하기 좋은 ‘깜깜이 보석 결정’
입력 2016-05-02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