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배영만 <2> 학교서 돌아오니 무당 어머니 “덩더쿵∼” 굿판

입력 2016-05-02 19:02
개그맨 배영만(앞줄 할머니 왼쪽)의 어린시절 어머니(뒷줄 오른쪽), 할머니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나무를 팔아 생계를 잇는 아버지는 이날 사진을 찍지 못했다.

나는 1959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형제가 11명, 아들 여덟 딸 셋. 내 위로 쌍둥이 내 밑으로 쌍둥이, 나는 여섯째였다.

어머니 곁에는 항상 사인펜이 있었다. 누구에게 젖을 먹였는지 기록해놔야 헷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젖을 준 뒤 사인펜으로 적고 다시 음식을 만들곤 하셨다.

한번은 물난리가 났다. 집 안에 물이 가득 찼는데, 가발이 떠내려가기에 냉큼 주웠더니 내 여동생이었다. 깜짝 놀랐다. 식구가 모두 13명이라 어디 멀리 함께 놀러 간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잘라 파셨다. 한두 달에 한번 정도 집에 들어오셨다. 집안 사정이 그렇다보니 어머니는 혼자 자식을 키우셨다. 어머니는 이런 아버지를 늘 원망하면서도 아버지만 집에 들어오시면 “아유, 여보 오셨어요”라며 반가워했다. ‘부부는 참 가깝고도 먼 사이구나’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 알게 됐다.

전셋집을 전전하다보니 부모님은 전세계약을 할 때 자식이 많다는 것을 숨겨야 했다. 누가 13명 식구에게 선뜻 방을 내주겠는가.

이삿날이면 주인집과 한바탕 싸움이 났다. 주인집에서 못 들어오게 막은 것이다.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주인어르신, 11명 애들을 데리고 어디로 갑니까. 흑흑….”

우리도 아저씨 아줌마의 바지잡고 치마잡고 “살려주세요”라고 울어댔다. 그러면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는 우리가 불쌍해 보였던지 “같이 살자”고 말하고 들어가 살았던 기억이 난다.

전셋집에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었다. 주인집 아저씨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30분이 걸렸다. 우리 식구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불편한(?) 동거였다. 한 달쯤 있으니 주인집 식구들이 따로 전세를 얻어 나갔다. “같이 고생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하시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오지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인가 싶다.

어머니는 무속인이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덩덩 덩더쿵∼” 굿이 한바탕 진행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뛰고 또 뛰었다. 자세히 보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제사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돼지머리와 시루떡, 생선, 사과, 배, 사탕 등. 형들은 먹을 것보다 돼지머리에 꽂힌 돈에 눈을 떼지 못했다. 굿이 진행되는 동안 돼지머리에 있던 돈은 전부 사라졌다. 이후 어머니는 돼지머리 주위에서 굿을 해야 했다. 돈이 없어질까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무속인 어머니가 싫었다. 창피했기 때문이다. 동네사람들이 “영만이 엄마는 무당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희한한 게 나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자랐다. 집 바로 앞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 목사님은 우리를 잘 돌봐주셨다. 점심과 저녁도 주셨다. 지금은 원로목사님이 되셨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고맙다.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감리교회 집사로 2003년 하늘나라에 가셨다. 아버지도 권사 직분을 받고 2011년 소천하셨다. 우리 가족 13명 모두 주님과 함께하고 있다. 할렐루야.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