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중간고사 시험공부를 하며 자신이 외운 것을 읊어볼 테니 확인해 달라며 필기한 노트를 가져왔다. 과학 과목이었는데 거기에 ‘조흔색’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긁어서(條) 나오는 흔적(痕)의 색(色), 조흔색. 전생의 기억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시 들으니 생생하게 기억나는 동창의 이름 같은 단어다.
광물의 겉보기색과 조흔색이 일치하는 ‘황금’과 달리, 겉보기색은 황금이지만 조흔판에 그어보면 검은색을 띄는 광물이 있다. ‘황철석’이라는 광물이다. 얼마 전 지나가다 TV를 보는데 마을 전체에서 황금이 난다는 제보가 있다며 리포터가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지질 조사를 해 보니 마을에 널린, 황금으로 알고 있던 광물은 다름 아닌 황철석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괜히 좋다 말았다.
겉보기색은 황금인데 조흔색이 검은색으로 나오는 황철석인 경우는 어쩌면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상처 내고 긁어보지 않으면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겉보기색에 현혹되어 다가갔다가 서로 긁히고 상처받고 나서야 안다. ‘아,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군’ 하며 돌아선다. 하지만 광물의 조흔색을 판단하는 것처럼 사람을 판단하는 조흔판도 있을까?
사람에 따라 그 조흔판은 크기도, 거칠기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긁히느냐에 따라 조흔색은 변할 수 있다. 내가 스무 살에 좋아했던 사람을 이십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 사람을 좋아할까? 그러나 계속 좋았다면 현재까지 만났을 것이다. 어느 순간 나의 조흔판에 그 사람이 긁히고, 그 사람의 조흔판에 내가 긁혔을 때 우리의 조흔색은 겉보기색과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번 확인한 조흔색은 광물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헤어지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흔판에 대고 서로를 긁는다. 정체를 확인한 후 헤어지고 싶어서. 하지만 정말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나만의 조흔판에 긁어 그 정체를 확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유형진(시인)
[살며 사랑하며-유형진] 조흔색과 겉보기색
입력 2016-05-01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