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종주국 잉글랜드는 1998 프랑스월드컵을 마치고 아르헨티나 선수 한 명을 물고 늘어졌다. 세상의 욕이란 욕, 조롱이란 조롱은 모두 이 선수에게 퍼부었다. 영국 대중지들은 연일 이 선수의 찡그린 얼굴을 1면 사진으로 실었다. 축구팬들은 삼삼오오 모여 욕설을 퍼부었다. 잉글랜드가 그에게 붙인 별명은 ‘아르헨티나의 악당’이었다. 바로 지금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 디에고 시메오네(46)가 그 악당이었다.
잉글랜드의 분노는 그해 프랑스에서 열린 월드컵 16강전 때문이었다. 자국 축구대표팀이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를 당한 뒤 일찌감치 짐을 싸야 했다. 그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그야말로 ‘철벽’에 가까웠다. 잉글랜드 선수들이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았다. 그 중심에 수비형 미드필더 한 명이 있었다. 시메오네였다.
아르헨티나 감독은 시메오네에게 딱 하나의 주문을 했다. 잉글랜드 간판스타였던 데이비드 베컴의 원천 봉쇄였다. 시메오네는 연장 후반까지 100분 넘게 베컴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베컴의 정교한 패스로 시작되는 잉글랜드 공격은 아예 손을 쓰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후반 2분, 베컴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시메오네를 가격했다. 즉각 비신사적 행위로 퇴장을 당했다. 밀착방어, 핵심선수의 퇴장, 승부차기 승리가 아르헨티나 승리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모두 시메오네가 만들어낸 그림이었다.
‘질식 축구.’ 시메오네식 축구는 이렇게 시작됐다. 선수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그는 자신만의 눈과 생각으로 완성한 새로운 축구를 선보이고 있다. 11명 전원을 수비수로 쓰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얼마 전 영면한 ‘공격 예술 축구’의 완성자 요한 크루이프가 살아 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안티 풋볼(Anti Football·반 축구)이냐”고 맹비난했을 법한 전략이다.
그런데 이런 시메오네의 축구는 전혀 ‘재미없지’ 않다. 수비를 하는데도 엄청 재미가 있고, 관중들은 열광하는 것이다. ‘안티 풋불’의 역설인 셈이다.
시메오네의 축구가 재미있는 것은 강력하고 재빠른 역습으로 드라마틱한 골을 넣어 이기기 때문이다. 그는 극단적인 수비전형인 3-5-2 포메이션이 아닌 공격형인 4-4-2 전형을 쓴다. 그리고 선수들을 세 줄로 수비 진영에 세워 경기 내내 한 팀처럼 움직이게 한다. 2명의 공격수도, 4명의 미드필더도, 4명의 수비수도 철저하게 자기네 진영을 지역으로 분담해 수비에 나서는 것이다.
상대 공격진은 이 세 줄 수비를 뚫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일쑤다. 겨우 골문 앞에 도달해도 골을 넣을 수 있을 만큼 날카로운 창을 찌르지 못하게 된다. 일선을 깨고 들어가도 또 ‘이선’이 들러붙고, 그 다음엔 전문 수비수로만 구성된 ‘삼선’이 거미처럼 붙어 다닌다. 상대 공격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만 만나면 진절머리를 내는 것이다.
올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실점은 35게임을 치러 고작 16골에 불과하다. 20개 팀을 통틀어 최소 실점이다. 시즌 막판까지 우승을 경쟁하는 1위 FC바르셀로나(29실점), 3위 레알 마드리드(32실점)와 비교해도 실점은 절반 수준이다.
압박수비는 역설적으로 빠르고 강한 역습의 시작이다. 공의 진행 방향이 바뀌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수비진 세 줄은 전부 공격진이 변신한다. 키플레이어는 공격수 앙투안 그리즈만(25·프랑스). 그리즈만은 최전방에서 마지막으로 공을 받아 빠른 역습을 완성한다. 그렇게 35라운드까지 모두 출전해 20골을 넣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31골·레알 마드리드), 리오넬 메시(25골·바르셀로나) 등 스타플레이어들과 경쟁하면서 득점 부문 6위를 달리고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꿈의 무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정복을 앞두고 있다. 다음달 4일 독일 뮌헨 원정 4강 2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비기기만 해도 결승으로 진출한다. 시메오네는 2014년 이후 두 번째 결승전의 문턱까지 다가갔다. 선수 시절 자신을 ‘악당’으로 몰았던 유럽에서 역사를 바꿀 기회가 눈앞에 놓였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안티풋볼의 역습’… 악당 시메오네의 질식 축구
입력 2016-04-30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