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한민수] 낙하산 잔혹사

입력 2016-04-29 18:30

노무현정권 초기, 정치인 출신 A가 한 공공기관 사장에 임명됐다. 낙하산이라고 반발한 노조는 회사 정문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며 취임을 저지했다. 다른 문을 통해 사장실에 들어간 A는 노조 간부들을 불렀다. 살기등등한 노조원들과 첫 대면을 한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 “이제 그만해라. 낙하산 이미 안착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농담’에 사장실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대화로 이어졌고 이후 노조와 관계가 원만해진 A는 임기를 채웠다. 이 기관도 정부의 공공기관 평가에서 괜찮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정·관피아’(정치권·관료+마피아)가 다시 기승을 부릴 모양이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인 알리오에 따르면 340개 공공기관 가운데 공석이거나 임기 만료로 연말까지 임명돼야 할 자리가 97개나 된다. 이곳에 4·13총선에서 낙천·낙선한 친박들이 대거 낙하산을 타고 내려갈 기세다. 하지만 정권 중·후반기의 대규모 낙하산 투하는 또 다른 잔혹사로 이어졌다.

노무현정권 말기 공공기관장과 감사 등에 친노들이 몰려갔다. 대선 직전까지도 이런 일이 있었다. 이명박정권이 들어서자 대대적인 낙하산 수거 작전이 펼쳐졌다. 청와대와 정부 내에 이를 담당하는 인력까지 있었다. 친노 낙하산을 거둬들인 자리에는 친이 낙하산들이 투입됐다. 공공기관 감사로 간 지 몇 달도 안 돼 바뀐 정권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한 친노 인사의 아쉬워하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번에 박근혜정권이 낙하산 집중 투하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들 중 상당수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서 잘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낙하산 잔혹사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앞의 A는 정치권에서도 추진력과 판단력 등을 꽤 인정받았던 사람이다. 낙하산 인사는 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만, 정권 입장에서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능력’과 ‘급’이 되는 이들이라도 보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음 정권에서도 자리를 보존할 여지가 생긴다. 아울러 그 낙하산 밑에서 묵묵히 일해야 하는 공공기관 직원들의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한민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