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루·은가루로 빚은 동양화… 기하학적 선 위에 삶을 녹여내다

입력 2016-05-01 18:37
‘플랜 B’(2016), 장지에 채색. 가나아트센터 제공

동양화란 무엇인가. 역사상 최초의 화가로 이름을 남긴 4세기 중국 동진의 고개지 이래 동양화의 전범은 수묵화였다. 융합이 키워드가 된 21세기에도 동양화, 서양화의 면면한 이분법은 유효한 것인가.

여성작가 정해윤(45)의 작품 세계는 이에 대한 고민의 발로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인 그는 동양화 물감과 함께 아교에 푼 금분과 은분을 사용한다. 전통 한지인 장지도 고집한다. 그런데 이 물감을 장지에 겹겹이 먹여 유화 같은 두터운 마티에르를 낸 결과물은 마치 서양화의 기하학적 추상화 같다.

무엇보다 형상 때문이다. 금속성의 원통형 기둥, 복잡하게 얽힌 배수관, 사슬처럼 꼬여 있는 유선형 관 등이 여백도 없이 화폭을 가득 채운다. 그나마 동양화적인 느낌을 주는 소재가 있다면 돌을 소재로 사용한 그림 정도. 이마저도 여백을 흰색으로 채웠다.

이럴 바엔 캔버스가 낫지 않을까. 지난 28일 만난 작가는 “동·서양화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재료에 있다. 특히 장지는 어느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중후한 매력이 있다”며 “장지에 색을 먹이고 먹이는 과정은 마치 (흙 같은 재료를 붙이고 붙이는) 소조를 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양화는 먹이 번지는 ‘발묵 효과’의 수묵 담채화이며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그림은 가까이 가서 볼 필요가 있다. 놀랍게도 머리카락보다 가는 선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면이다. 더욱이 은분과 금분을 사용해 마치 화려한 은사, 금사로 촘촘히 직조한 직물의 느낌마저 준다. 거기에 박새가 있고, 실타래가 있다. 돌멩이에는 저마다 안은 인생처럼 시침과 초침이 있다.

그렇게 삶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그림이다. 사슬처럼 꼬인 관의 형상을 보고 엉킨 삶의 실타래를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빠져나온 실타래의 가는 선을 전깃줄 삼아 앉아있는 박새의 위태로워 보이는 모양에서는 견고해보이지만 내면은 불안한 인생을 연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수한 돌들이 모서리가 마모되어 어깨를 부딪치며 나열되어 있는 그림에선 세파에 닳아가는 삶이 오버랩 되기도 할 것이다.

화폭 안에 형식상으로는 동양적 색조와 서양의 공간 분석적 사고를 아우르며 주제에서는 삶을 녹여내는 현대적 동양화다. 문제는 서양인도 동양인도 누구도 처음엔 그의 그림이 동양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중간의 경계가 주는 팽팽한 긴장감이 그림의 매력이다. 올해 3월 유럽 최고 아트페어의 하나인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의 테파프에 출품돼 호평 받았다.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가나아트센터 ‘플랜B: 정해윤 개인전’. 5월 23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