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속 규제개혁위원회(이하 규개위)가 담뱃갑 상단에 들어가기로 한 경고그림 위치를 담배회사가 알아서 넣도록 보건복지부에 권고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고 있다. 또 이러한 조치가 담배 제조사와 소매상 요구 때문이라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규개위가 경제적 논리만 앞세워 국민건강을 포기했다는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규개위는 지난 4월22일 ‘경고그림을 상단에 넣거나 하단에 넣거나 효과 차이를 입증할 자료가 부족하다’며 경고그림 위치를 담배회사가 알아서 넣게 하자고 결론 내렸다. 앞서 정부는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이하 FCTC)에 근거해 담뱃갑 경고그림 표기 의무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2016년 12월23일부터 반출되는 담뱃갑에 경고그림을 부착토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지난 2015년 5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후 보건복지부는 효과성이 검증된 경고그림 10종을 선정해, 본격적으로 경고그림 부착 준비에 돌입했다.
문제는 규개위가 국민건강증진법 시행령 심사과정에서 담배업계 의견을 듣고 담뱃갑 상단에 경고그림을 배치토록 규정한 시행령 철회를 복지부에 권고했다는 점이다. 당시 담배업계 관계자는 ‘경고그림이 담배 판매자의 정신건강을 해친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규개위가 FCTC 조항을 위반했다고 지적한다. FCTC 제5조3항 가이드라인은 담배업계의 정책수립과 관련된 정부위원회 참석을 불허하고 있다. 이는 담배업계 로비로부터 공중보건 정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FCTC는 국제법으로서 협약내용을 따를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며, FCTC 비준국가로서 2014년 의장국 역할을 했었던 만큼 오히려 선진적 대응을 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통령 직속 규개위의 이번 판단은 국제협약을 위반했다는 국제사회의 조롱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 규개위가 2014년 9월 경고그림 부착 심사 당시 ‘국제협약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국민건강증진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금연정책이 추진돼야’한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위원 상당수가 동일인임에도 전혀 다른 판단을 내려 이해하기 힘들다는 시각도 많다.
그렇다면 경고그림 위치는 금연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FCTC 제11조를 보면 ‘건강 경고 및 메시지는 담뱃갑 앞면과 뒷면 상단에 위치하는 것이 하단 배치보다 가시성이 좋다. 당사국은 건강 경고와 메시지의 가독성 증가를 위해 하단보다 주요 표시면 상단에 위치하도록 요구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국내 한 조사에서도 상단 경고그림이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고그림이 아래에 위치할 때보다 위쪽에 위치할 때 시선점유율(상단 61.4%∼65.5%, 하단 46.7%∼55.5%)이 최대 20%정도 높았다. 또 경고그림과 경고문구 모두 위쪽에 위치할 때 응시시간이 길어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외의 경우도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51개국이 앞면(뒷면 50개국) 상단에, 바레인과 이란 등 25개국(뒷면 23개국)이 앞면 하단에 경고 메시지를 배치했다. 또 EU 가입국은 5월부터 담뱃갑의 상단에 경고그림을 배치할 것으로 규정했다.
상단 표기 의무가 담배회사의 디자인 등 영업권을 일부 제한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국민건강을 감안하면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규개위 권고가 알려지자 대다수 시민단체가 강하게 반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3개 시민단체와 보건관련협회가 참여한 흡연제로네트워크는 “담배 경고그림 부착은 위해제품에 대한 노출과 접근을 최소화해 청소년과 소비자 보호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 규개위는 즉각 재심을 통해 강력하고 적극적인 경고그림을 부착토록 해야한다”고 밝혔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의 공동연구체 건강과대안도 “규제개혁 위원들은 ‘국민 살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인가”라며 “규개위의 ‘강제할 근거 부족’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국민건강을 외면한 이번 결정은 담배기업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금연지원센터 오유미 박사는 “금연 효과성을 높이려면 경고그림이 잘 보이는 담뱃갑 상단에 위치해야 한다”며 효과적인 경고 그림 활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5월 13일 예정된 재심의에 대비해 규개위가 부족하다고 주장했던 상단 경고그림의 효과에 대한 근거를 확보해 기존 시행령을 통과시킨다는 방침이다.
조민규 기자 kioo@kukimedia.co.kr
“담뱃갑 경고그림 위치는 제조사 마음대로 해라”… 업계 압력에 몽롱해진 금연정책
입력 2016-05-01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