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80代 노인의 석연찮은 자살

입력 2016-04-28 17:49

“나 농약 마셨어….” 지난 17일 A씨(81)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놀란 딸이 다시 A씨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쓰러진 뒤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대원들이 병원으로 옮겼지만 A씨는 끝내 숨졌다. A씨는 8일 뒤인 25일에 주거침입과 폭행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피의자’였다. 그는 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일까.

A씨는 지난 9일 오후 2시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B씨(41·여) 집에 들어섰다. 당시 B씨는 외출 중이었고, 집에는 B씨의 아버지와 고모가 있었다. 이들은 A씨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고 B씨 고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은 A씨에게 주거침입과 폭행 혐의, B씨 아버지에겐 상해 혐의를 적용해 조사키로 했다. A씨는 몸싸움을 하다 다쳤다면서 고통을 호소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몸싸움이 있기 4시간 전 B씨 아버지와 고모는 집 근처 지구대를 찾았다. B씨 아버지는 ‘정신지체가 있는 딸이 집에 혼자 있을 때 어떤 할아버지가 드나든다. 딸 몸에 상처가 난 사진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단서는 ‘아코디언’이었다. B씨는 ‘어디에서 난 아코디언이냐’는 가족들의 질문에 “동네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줬다”고 답했다. 계속 추궁하자 B씨는 “할아버지가 집 열쇠도 복사해 갔다”고도 말했다고 한다. 정신지체가 있는 B씨는 목에 집 주소를 적은 메모지와 열쇠를 걸고 다녔다. B씨의 아버지는 누군가 열쇠를 복사한 뒤 집에 들어와 딸을 때린다고 의심했다.

B씨 가족들은 지구대에서 40여분간 상담을 했지만 ‘범인을 알 수가 없다. 할아버지가 다시 나타나면 신고해 달라’는 말만 들었다. 결국 가족들은 조를 짜서 집 안에서 A씨를 기다린 끝에 붙잡았다.

병원에 가기 전 A씨는 경찰관에게 “B씨를 좋아한다. 떡을 주러 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경찰조사에서 “할아버지가 수차례 몸을 만졌다. 말을 안 들으면 때렸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씨를 상대로 강제추행 혐의도 조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A씨는 경찰 출석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될 예정이다. 남은 건 B씨의 진술뿐이다.

경찰이 B씨 가족의 신고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경찰 측은 “피해자 가족이 경찰의 설명을 오해한 것 같다. 피해자 집 주변 순찰을 강화했었다”고 해명했다. 신윤균 서울 영등포경찰서장은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보다 세심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김판 권준협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