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 시절 ‘선수 염경엽’은 평범했다. 사실 못했다는 말이 더 맞다. 유격수로서 통산 타율이 1할대(0.195)였다. 수비는 괜찮았지만 1996년 당시 신인 박진만에게 밀린 이후 대주자나 대수비 요원으로 간간히 경기에 나왔다. 고교(광주제일고) 시절 청소년 대표에 선발됐고, 명문 고려대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염경엽은 프로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했다.
2000년 현대에서 은퇴했지만 코치는 되지 못했다. 곧바로 현대 프런트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프런트로 일하면서 많은 설움을 겪었다. 2004년 현대가 우승했을 때 그는 운영팀 직원이었다. 잠실구장에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우승 축하연을 준비해야하는데 억수같이 내리는 비 때문에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비를 흠뻑 맞고 롯데호텔까지 뛰어가 플래카드를 달고, 우승 동영상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초라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염경엽은 결국 2007년 당시 현대 사령탑이었던 김시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꿈에 그리던 코치가 됐다. 그런데 이듬해 팀이 해체되면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그는 LG 트윈스로 자리를 옮겼고 스카우트팀 과장, 운영팀장, 수비코치로 활동했다. 그리고 2011년 넥센으로 와 작전·주루코치로서 스승인 김시진 감독을 보좌했다. 결국 2012년 김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자, 이장석 사장은 그를 넥센의 3대 사령탑에 선임했다.
염경엽이 ‘감독’이 되자 팀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 약팀의 대명사였던 넥센은 염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고 경기를 치른 2013년 창단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 다음 해에는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염 감독이 지휘하는 넥센이 꼴찌 후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강정호와 박병호가 빠졌고, 20승 투수 앤디 밴헤켄도 일본에 새 둥지를 틀었다. 클린업트리오의 한 축이었던 유한준도 팀을 떠났다. 든든한 마무리 손승락은 롯데 유니폼을 입었고 주축 불펜 조상우와 한현희는 모두 부상으로 경기에 못나오고 있다. 장기로 치면 차와 포, 마, 상까지 떼낸 상태다. 그런데도 끈끈한 플레이로 28일 현재 11승1무10패로 3위에 랭크돼 있다.
염 감독은 국내 여러 지도자들의 장점을 고르게 지니고 있다. 스승인 김시진 감독으로부터는 소통과 선수육성 능력을 배웠다. 염 감독은 형님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편하게 대한다. 올 시즌 넥센 마운드는 붕괴된 것으로 보였지만 중고신인 신재영을 키워냈다. 혜성같이 나타난 신재영은 4승을 기록하며 넥센 상승세의 근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지금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강정호와 박병호, 신고선수로서 사상 첫 한 시즌 200안타의 신화를 이룩한 서건창 등이 모두 염 감독이 키워낸 인물이다.
한화 이글스 김성근 감독의 철저한 데이터 분석도 그에게서 엿보인다. 염 감독은 후보 선수 시절 야구를 포기하려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수첩에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하며 공부했다. 그는 “언젠가 코치가 되려면 지식이 많아야 하고 나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 상대 투수의 장단점을 가르쳐줬고, 여러 조언을 해줬다. 그는 지금도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해 상대 팀 전력분석에 활용한다. 염 감독은 “전략적인 부분은 김성근 감독의 야구를 본받고 싶다. 김 감독 야구를 분석하고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소개했다. 야구계에선 전술 싸움과 지략 대결에 뛰어난 그를 삼국지의 제갈량에 빗대 ‘염갈량’으로 부른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의 ‘두려움 없는 야구’도 넥센 경기에 나온다. 염 감독은 선수들이 헛스윙 삼진을 당하거나 활발한 주루플레이를 벌이다 아웃되더라도 박수를 쳐준다. 유일하게 그가 크게 화를 내는 순간은 선수들이 이기겠다는 의지를 잃고 눈이 쳐졌을 때다.
이제 감독 4년차. 염 감독은 “우리 팀엔 전문가나 팬들의 눈에 안 보이는 전력이 있다. 이 전력을 최대한 끌어내 반드시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겠다”고 했다. 그 안 보이는 전력이 바로 염 감독이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염갈량’의 지략, 두 장수 없어도 빛난다
입력 2016-04-29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