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흥우] 이 나라가 싫다는 사람들

입력 2016-04-28 17:43

물설고 낯선 타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는 대략 두 가지다. 보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거나 이 나라가 싫어서다. 필드하키 국가대표 출신 김순덕씨 경우는 후자다.

그는 1986·90년 서울·베이징아시안게임 금메달, 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리스트다. 이 공로로 체육훈장 맹호장, 국민훈장 목련장,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그에게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조국’이었다. 그러나 99년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총 23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씨랜드 화재 사고 이후 대한민국은 더 이상 자랑스럽지도, 살고 싶지도 않는 나라가 됐다.

이 사고로 여섯 살 난 아들을 잃어서가 아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그를 더욱 화나게 한 건 사고에 대처하는 정부의 안일하고 무성의한 태도였다.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도 벌였고, 김종필 총리도 만났지만 결과는 죽은 사람만 억울한 셈이 됐다. 그나마 사고와 관련돼 구속된 공무원에 대한 처벌마저 흐지부지되자 그는 “이 땅에서 살 의미를 잃었다”며 훈·포장을 반납하고 미련 없이 뉴질랜드로 떠났다.

15년 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도 김씨가 그랬듯이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세월호 참사 며칠 후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김씨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과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때 김씨는 “저희 때와 다를 게 아무것도 없다”고 개탄했다.

얼마 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와 해경 사이에 오간 교신 내용을 공개했다. 녹취록에 따르면 청와대는 구조보다 VIP(대통령)에게 보고할 영상·화상자료 챙기는 데 관심이 더 많았다. 그 바람에 해경은 청와대에 보고할 영상과 사진을 챙기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다.

국가와 정부는 국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부 구성원인 공무원이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헌법 제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일 드러난 청와대와 해경의 행태는 결코 국민에 대한 봉사자는 아니었다. ‘VIP 바라기’일 뿐이었다.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가 “이 나라가 싫다”고 되뇌는 속사정이 있다.

건강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원인도 모른 채 줄줄이 숨을 거두었다. 보다 쾌적하고 위생적인 환경을 위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가 살인마인줄 이들은 몰랐다.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만 146명에 이른다. 피해자 측은 220명이 넘는다고 주장한다. 2002년 첫 사망자가 나온 이래 질병관리본부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9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는 데 다시 5년이 흘렀다.

피해자들은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본사까지 찾아가 원정시위를 벌였다. 정부가 나서주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는 게 이들의 항변이다. 환경부 장관 면담을 신청한 게 언젠데 아직 아무 답변이 없단다. 살균제 피해로 아내와 뱃속의 태아를 잃은 안성우씨는 최근 “재상(아들)이와 대한민국을 떠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남겼다. 공무원들이 웃전에 쏟는 관심의 눈곱의 때만큼만 이들에게 기울였어도 옥시가 “황사가 폐질환의 원인”이라며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오만방자한 작태를 보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김순덕, 김동수, 안성우씨가 정부에 바라는 공통점이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국민의 아픔을 내 일처럼 보듬는 정부가 되어달라는 거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