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김병삼] 목회자 일탈, 드러내 치료하자

입력 2016-04-28 19:43

‘일탈행동’이란 사전적 의미로, 사회에서 규정한 제도나 규범에서 벗어난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탈은 ‘실수’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목회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실수는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병이고 습관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일탈행위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려 하지 않고 감추거나 보호하려는 어쭙잖은 시도에 기인한다. 교회와 목회자를 치리하는 자리에 앉은 지도자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 일탈행위가 있어도 보호해야 한다는 목회자의 잘못된 동료의식은 흔히 자리를 바꾸는 ‘돌려막기’식 인사이동이 성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행위는 소위 사회적 규범에서 용인되지 않는 심각한 일탈행위다.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거나 심지어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심각한 일탈은 ‘행위’ 자체에 있기보다 그러한 일탈을 다루는 ‘방법’의 문제에 있다. 왜 목회자와 교회는 심각한 일탈에도 용서를 빌지 않는가? ‘교회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하지만 사실 상처는 드러내고 째고 도려내야 한다. 그리고 약을 바르고 감싸주어야 한다.

물질과 이성에 대한 일탈은 때론 실수이기도 하고 중독이기도 하다. 실수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징계’가 있어야 하고, 중독을 고치려면 ‘치료의 시간’이 필요하다. ‘용서’가 없는 교회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용서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뼈저리게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주의적 ‘징계’를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값비싼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징계를 통해 실수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치료의 시간을 통해 다시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재무장’하자는 것이다.

어윈 루처의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실수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리는 회복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탈행위가 근자에 나타난 현상인지, 아니면 감추었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일탈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명의 부재’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라는 책에서 소명을 이렇게 정의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의 일차적인 소명은 그분에 의한, 그분을 향한, 그분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누군가(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것이지, 무엇(어머니의 역할이나 정치나 교직)으로나, 어디(도시 빈민가나 몽골)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소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보다 ‘누가 우리를 불렀는가?’를 생각한다. 부르심을 망각하는 사람들의 ‘무엇’과 ‘지위’는 심각한 자기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소명은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목회자의 심각한 위기는 나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이다.

소명의 가장 명확한 증거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인데 ‘내’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가려진다는 것은 분명한 소명자의 일탈이다. 목원대학 신학관 입구에는 이호운 목사님이 만든 찬송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시비가 있다. 신학교를 졸업하거나 목사 안수를 받을 때면 늘 부르던 이 찬송이 언제부터인가 목회자에게 ‘금지곡’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부르심을 망각하면 자신 속에 있는 욕망의 찌꺼기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욕망이 일어나 부르신 이를 보지 않거나 가려버리면 일탈이 시작된다. 일탈의 가장 좋은 치료법은 소명의 회복이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