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백승, 한국형 아이스하키의 기적

입력 2016-04-28 04:00
‘백지선호’의 공격수 김기성(오른쪽 두 번째)이 지난 26일(한국시간)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2016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3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제공
한국 대표팀이 일본을 3대 0으로 완파한 뒤 태극기를 펼쳐 들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제공
1982년 스페인 하카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C풀(3부 리그) 대회. 한국은 일본에 0대 25로 참패했다. 그간 일본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한국은 2014년 4월 고양에서 열린 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2부리그) 경기(2대 4 패)까지 일본에 1무19패로 절대 열세를 면치 못했다.

2016년 4월 26일(한국시간) 폴란드 카토비체. 한국은 2016 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3차전에서 일본을 3대 0으로 완파했다. 이뿐 아니다. 3경기에서 벌써 승점 7점(2승·1연장패)을 확보했다. “아이스하키 변방 중의 변방인 한국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 세계 아이스하키계가 깜짝 놀라 던지는 질문이다.

한국이 일으키는 돌풍의 중심엔 백지선(49) 감독이 있다. 2014년 7월 한국 아이스하키 사령탑에 오른 백 감독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석 달 전 고양 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대회에서 5전 전패로 꼴찌를 한 선수들은 패배의식에 빠져 있었다.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도 없었다. 백 감독은 우선 대표팀 기강부터 바로잡았다. 라커룸에 태극기를 걸었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또 훈련에 지각하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발탁하지 않았다. 대표선수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백 감독이 누구던가? 한 살 때 부모를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간 백 감독은 1985년 한국인 최초로 피츠버그 펭귄스의 지명을 받았다. 1991년과 1992년엔 수비수로 스탠리컵(챔피언 결정전) 우승에 큰 힘을 보탰다. 현역 은퇴 후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명문인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산하 마이너 팀에서 지도자 능력을 인정받았다.

백 감독은 선수들에게 “하키를 즐기라”고 한다. 이를 위해 지원 스태프가 라커룸을 정리하게 하는 등 선수들이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또 대표팀 선발 때 이름값을 따지지 않고 내부 경쟁을 유도했다. 백 감독은 NHL에서 쓰는 전술을 대표팀에 도입했다. 선수들은 이를 받아들여 실전에 활용했다. 그 결과 전에 없던 ‘약속된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NHL에서 241포인트를 올린 재미교포 박용수(39) 코치도 한국 아이스하키 중흥의 한 점이다. 백 감독을 따라 코치로 부임한 박 코치는 NHL 명문팀 뉴욕 아일랜더스 시절 팀 부주장을 맡았을 정도로 뛰어난 리더십과 명석한 ‘하키 두뇌’를 자랑하는 전술통이다. 두 코칭스태프는 몸집은 작지만 빠른 스케이팅을 자랑하는 우리 선수들의 장점과 서구 스타일의 강력한 바디체크, 모든 플레이를 철저하게 전형을 유지하며 수행하는 방식 등을 몸에 익히게 만들었다.

‘백지선호’ 성공의 빼놓을 수 없는 요인에는 6명의 귀화선수도 있다. 아이스하키는 국적의 경계가 허물어진 스포츠다. 북미의 많은 실력파 선수들은 유럽 국가에 귀화해 활약하고 있다. 한국에선 브락 라던스키, 맷 달튼, 에릭 리건, 마이크 테스트위드(이상 안양 한라), 브라이언 영, 마이클 스위프트(이상 고양 하이원)가 태극마크를 달고 뛰고 있다. 이들이 합류한 후 한국의 전력은 크게 강화됐다.

특히 골리인 달튼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다. 아이스하키에서 골리는 야구의 선발투수처럼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다. 달튼은 이번 대회 1, 2차전에서 68세이브를 기록했다. 세이브 성공률은 무려 94.44%(공동 1위)에 달한다.

달튼은 IIHF에 실린 인터뷰에서 “우리는 어떤 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남들은 우리를 언더독으로 보겠지만, 우리는 모든 걸 다 쏟아부어 한국 아이스하키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고 각오를 전했다.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9개팀이 겨루는 아시아리그도 한국 아이스하키가 성장한 요람이다. 팀당 48경기씩, 총 216경기를 치르는 정규리그는 기량을 연마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백 감독은 늘상 선수들에게 “하키(Hockey)는 하트(Heart)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반드시 기적을 이루겠다”고 했다. 체격이 서구 선수보다 작다고 투혼까지 작아선 안 된다는 말이다. 상대 선수들에게 야수처럼 달려드는 태극전사들의 투혼에서 한국 아이스하키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