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배숙 <9> ‘군산 개복동 참사’ 계기 성매매방지법 대표 발의

입력 2016-04-27 20:29
조배숙 당선자(가운데)가 2008년 9월 서울 국회도서관 회의실에서 열린 ‘성매매특별법 4주년 성과 및 향후 과제’ 토론회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02년 1월 전북 군산 개복동에서 꽃다운 나이의 여성 1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같은 지역의 대명동 화재사건으로 5명이 사망한 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사고라 충격이 컸다. 무엇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은 대명동 사건 당시 여성들을 감금한 채 성매매를 강요한 악덕 업주 중 개복동 사건에 연루된 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입건된 뒤에도 버젓이 성매매 영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웅장한 홀이 있는 10억짜리 룸살롱을 주택가에 짓다니.’ 그는 그러고도 초호화 생활을 했다. 성매매 업소는 주택가와 학교 주변까지 침투해 있었다. 이 같은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만 국내에 150만명으로 추산됐다. 가임여성 10명 중 1명이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미국은 2001년 인신매매 보고서에 한국을 3등급 국가로 분류할 정도였다. 국제적 망신이었다.

문제는 법 때문이었다.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이 성매매 알선 포주와 주변 매개체에 대해 너무 경미한 처벌을 내리도록 했다. 그렇다보니 명의만 바꾸면 영업을 할 수 있었고 감금 여성이 탈출하면 업주가 사기죄로 고소해 체포를 당하는 한심한 상황이었다.

군산화재 사건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진술은 충격적이었다. 경찰이 업주들로부터 성 상납을 받고 단속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등 유착관계가 심했다. 사실 경찰이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철창이 쳐진 2.6㎡(0.8평) 크기의 쪽방에서 24시간 감금하는 노예매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2002년 성매매방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그 과정에서 ‘의원님이 여성이시라 남자를 너무 모르시는 게 아니냐’는 항의도 있었다. 국회 홈페이지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과도한 접속으로 다운되기도 했다. 법이 제정되면 손해를 보는 집단이 만만치 않게 있었다는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여러 번의 공청회와 논의를 통해 2004년 4월 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2005년 9월 인천 숭의동 지역에서 시행 중인 성매매여성 자활지원 시범사업을 돌아볼 일이 있었다. 마침 일자리 창출프로그램 수료식이었는데 10명의 여성들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들 대부분은 중졸 이하의 학력이었다. 평균 14세의 나이에 성매매산업에 유입돼 10년 이상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집이 가난해 ‘가족들을 위해 나 하나 희생한다’는 생각으로 견뎠지만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고 했다.

“왜 성매매가 싫으면서 빠져나오지 않았어요?” “거기서 나오면 생활할 곳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어서요. 엄두를 못 냈어요.”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법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업주들은 ‘너희들을 붙잡아 경찰에서 잡아 가두고 처벌하려고 한다’며 왜곡해서 알려줬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그들 중 한 여성의 말을 잊을 수 없다. “이 법을 발의해 주시고 저희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의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들과 포옹을 하면서 입법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법 제정 당시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 법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해방된 모습을 보니 큰 보람이 느껴졌다.

성매매방지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성산업이 번창한다면서 회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법으로 인해 성매매 집결지가 축소되고 성매매가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긍정적 효과를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 최근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사건이 있었지만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위헌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감사한 일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