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높고 파란 가을하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해운대에 북적이는 영화인,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네필(영화광)이 만들어내는 동질감과 흥겨움.
1996년 시작돼 올해 21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명성은 해외에서 더 높다. 일본 도쿄영화제나 중국 베이징영화제도 있지만 아시아의 대표영화제는 부산이다. 베이징이나 도쿄는 아시아 최고가 되기 위해 국가와 도시 차원에서 영화제를 지원한다. 억대의 비용을 들여 할리우드 스타를 초청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그래도 아시아 대표는 부산영화제다. 왜일까. 부산영화제는 정치색이 없다.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감독은 자국에서 검열로 상영되지 못하는 영화를 부산에 가져온다. 망명 중인 감독의 영화도 이곳에선 상영된다. 판단 기준은 오로지 작품성이다. 관객의 호평을 받거나 해외 프로그래머의 눈에 띄면 국제적으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기도 한다.
국가와 이념을 초월해 영화로 하나가 된다는 믿음. 20년 동안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최고영화제로 성장해온 원동력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팔길이 원칙’이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안 한다’는 문화행정 원칙이다. 부산시는 1회부터 영화제 예산의 절반가량을 지원하고 있다. 부산시장이 당연직 조직위원장을 맡고는 있지만 영화제 프로그램 구성 등에 대한 간섭이 없었다.
그런데, 그 영화제가 흔들리고 있다. 아니 이미 침몰하고 있다. 부산시가 영화제를 권력으로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014년 세월호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 상영으로 촉발된 부산시와 영화제 집행위원회 간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다. 급기야 영화인들은 영화제 불참을 선언했다. 서병수 부산시장이 영화제 조직위원장에서 즉각 사퇴하고, 부산시가 영화제의 독립성을 보장하지 않으면 보이콧하겠다는 결정이다.
문제가 해결될 여지는 남아 있지만 예년 같은 풍성한 영화제가 되긴 힘들어 보인다. 이미 해외에서는 올해 영화제가 정상적으로 열리는지, 출품을 해도 되는지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출품작 선정 등 여러 절차상 5월 초까지 갈등이 풀리지 않으면 영화제 차질은 불가피하다. 침몰하는 영화제를 지킬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2004년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화씨 911’이 상영됐을 때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정치적 성향은 화씨 911을 만든 마이클 무어가 가진 것이지 칸영화제가 가진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화씨 911은 당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침략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 영화를 제작했다고 감독이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도 칸영화제 측에 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화는 그해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다큐멘터리 작품으로는 처음이었다.
영화제는 영화를 상영하고, 작품은 관객이 평가하면 된다. 조직위의 정치 성향과 맞지 않는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마찰을 빚고 결국 집행위원장이 물러나게 된 부산영화제와는 대조적이다.
매년 5월 칸영화제가 막을 내리면 세계 영화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10월에는 부산에서 만나자.” 그들이 올해도 부산을 찾을까. 우리 영화인들이 등을 돌린 영화제에 세계인들이 찾아올까. 명성은 쌓기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20년 동안 영화인과 영화팬들이 만들어온 부산영화제의 가치는 지켜져야 한다. 정치가 문화를 멈추게 해선 안 된다.
한승주 문화팀장 sjhan@kmib.co.kr
[데스크시각-한승주] 부산국제영화제의 골든 타임
입력 2016-04-27 1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