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들어왔습니까?” “아직. 빌려간 추리소설이나 먼저 갖고 오게.”
대화 내용만 보면 서울 어느 책 대여점이 연상되지만 놀랍게도 최근 북한의 책방 모습이라고 한다. 개인이 운영하는 도서대여점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의 외국서적을 몰래 대여하는가 하면 휴대전화로 남한의 e북(전자책)을 읽는 등 북한 사회의 저변이 빠르게, 더 많이 외부 문물에 노출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통일연구원(원장 최진욱)은 26일 발간한 ‘북한인권백서 2016’에서 2014년 말부터 2015년까지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186명에 대한 심층면접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백서는 2013년 양강도 혜산에서 일본 추리소설, 미국 소설을 대여해주는 동네 책방이 인기를 끌었다고 소개했다. 남한 인터넷에 올라온 소설의 번역 파일을 프린트하거나 북한 주민이 자체 번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미국 소설, 일본 추리소설 등 해외 문학작품이 대여점에서 인기를 끌고 e북 형식으로 ‘정주영 자서전’이나 ‘대부’ 등이 유행했다는 것이다.
2012년 역시 혜산시에서는 21세 남성이 남한 및 외국 서적을 접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이 남성은 군사학교 컴퓨터 교원에게 서적을 입수, 이를 USB 메모리에 저장했다가 주민들의 외부 정보 접촉을 단속하는 검열 조직인 ‘109 상무’에 적발됐다. 그는 뇌물로 중국돈 4000위안을 내고 처벌을 면했다고 전했다.
북한 당국은 이처럼 북한 내 외부 정보를 퍼뜨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해외 서적과 한국 드라마 등 불법녹화물, 휴대전화 등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며 주민이탈 방지와 체제 강화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불법녹화물과 휴대전화에 대한 단속과 처벌을 강화하고 있지만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단속을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양강도에서는 한국영화와 음악을 시청·청취할 경우 발각 시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문을 내리고 시범케이스로 총살도 집행했다. 하지만 몰래 시청은 꾸준히 계속됐고 발각될 경우 최소 노동교화형이기 때문에 대처법(뇌물)을 미리 마련해 놓고 즐긴다는 증언이 많았다.
휴대전화 역시 전국 곳곳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2014년 8월에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지시로 독일제 전파감시기까지 수입해 단속에 나섰다. 적발될 경우 5000∼1만5000위안에 달하는 뇌물을 주고 풀려난 다수의 사례가 보고됐다.
성분·계층에 따른 차별과 관련해 토대(신분) 기준을 완화했다는 증언이 수집된 점도 주목된다. 북한은 간부 등용, 입당, 대학진학, 직장배치 등에서 토대에 따른 차별이 만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은 2012년 3월 주민등록문건 ‘개혁(재정리)’ 사업을 단행했다. 개인의 토대를 평가하는 범주를 기존보다 축소해 성분 규정을 일부 완화했다고 전해진다. 남녀 모두 증조할아버지와 그 형제까지를 토대 범위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남자의 경우 사촌형제까지, 여자의 경우 남자형제까지만 토대 범위로 간주하도록 했다.
이밖에 탈북 행위에 대한 처벌이 탈북 시도 횟수에 관계없이 대폭 강화돼 재탈북 확률이 현저히 감소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체제 전반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유명무실화된 사회보장제도나 북한 해외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환경 등에 대한 증언도 다수 전해졌다.
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
처벌 세졌지만… 北 주민 휴대전화로 남한 전자책 탐독
입력 2016-04-27 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