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 한국과 이탈리아가 1-1로 맞선 연장 후반 12분 이영표가 하프라인 왼쪽에서 페널티박스 안으로 높게 띄운 공은 안정환의 머리를 맞고 굴절돼 골문 오른쪽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정환의 골든골. 한국을 한일월드컵 8강으로 이끈 결승골이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월드컵 4강 진출의 업적을 남기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했고,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골이었다.
허무하게 뚫린 세계 최강 이탈리아 카테나치오(빗장수비)의 마지막 방어선. 그곳을 지킨 수문장은 잔루이지 부폰(38·유벤투스·사진)이었다. 1998년 스무살의 나이로 프랑스월드컵에 출전했지만 후보였다가 처음으로 주전 골키퍼가 된 한일월드컵에서 그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우리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인 부폰의 얼굴은 골든골 폐지 여론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월드컵에서 골든골을 폐지했다.
전성기에 맛본 시련은 부폰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A매치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대표팀으로 달려갔다. 경기 횟수가 늘어날수록 카테나치오의 완성도는 높아졌다. 그렇게 4년 만에 다시 도전한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는 우승했다. 부폰이 조별리그 1차전부터 결승전까지 모두 7경기에서 기록한 실점은 고작 2골일 뿐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카테나치오 최고의 자물쇠였다. FIFA는 이런 그에게 야신상(월드컵 최우수 골키퍼)을 수여했다. 월드컵을 들고 금의환향한 조국에선 4급 훈장까지 받았다.
역도선수 아버지와 원반던지기선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누나마저 배구선수였던 가정적 배경은 부폰을 자연스레 운동선수의 삶으로 이끌었다. 유소년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였지만 1995년 이탈리아 파르마로 입단하면서 골키퍼로 전향했고, 2001년 세계 최고의 명문 중 하나였던 유벤투스로 이적해 새롭게 출발했던 축구선수의 인생은 독일월드컵에서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만하지 않았다. 부폰은 노력만큼이나 재능이 중요한 골키퍼 포지션에서 천재성만 믿고 훈련을 게을리 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코칭스태프, 동료, 팬과의 의리도 그에겐 중요했다.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복귀한 유벤투스가 승부조작 사건에 휘말려 두 시즌의 우승 기록을 박탈당하고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 B(2부 리그)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골문을 지켰다. 승부조작 사건을 계기로 팀을 재편한 유벤투스는 우승을 차지하고 2006-2007 시즌 세리에 A로 복귀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쿠데토(리그 챔피언이 유니폼에 붙이는 문양)는 세리에 B 타이틀이다.”
부폰은 프로로 입문하고 유일하게 경험했던 2부 리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26일 생애 8번째 스쿠데토를 손에 넣었다. 유벤투스는 리그 2위 나폴리가 AS로마 원정경기에서 0대 1로 져 역전우승의 실낱같은 가능성을 무산시키면서 2015-2016 세리에A 우승을 확정했다. 부폰이 입단한 뒤 7번째, 세리에 B까지 포함하면 8번째 우승이다. 2011-2012 시즌부터 5년 연속이다.
부폰은 지금까지 소화한 올 시즌 34경기에서 17실점했다. 90개의 유효슛 중에서 73개를 막았다. 세이브 비율은 81%. 클린시트(무실점 승리)는 20차례였다. 20라운드부터 30라운드까지는 974분 연속 무실점 대기록까지 세웠다. 리그 개막을 앞두고 공격수 카를로스 테베스(32·보카 주니어스), 미드필더 아르투로 비달(29·바이에른 뮌헨) 등 핵심 선수들의 갑작스러운 이적으로 혼란에 빠졌던 유벤투스를 일으켜 세운 올 시즌 그의 활약상은 더 빛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때 15위까지 순위가 떨어졌지만 여기까지 올라와 우승했습니다. 자부심을 느낄 일입니다. 어린 선수부터 베테랑까지 합심해 또 한 번의 역사를 썼습니다.”
국가대표로 20년, 프로로 22년을 보내면서 축구인생의 여러 굴곡을 경험한 38세 베테랑 골키퍼는 어느새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부폰, 거미손의 전설… 세리에A 우승컵 7번째 손에 넣어
입력 2016-04-26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