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무실을 찾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하루는 법원 17층에서 내려다보는데 웬 건물에 ‘임대’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린 게 보였다.
사무장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평수도 적당하고 1층인 데다 법원과 검찰청도 가까웠다. 안성맞춤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규모의 그 건물은 정곡빌딩 서관 뒤에 있었다. 명함에 정곡빌딩 서관 뒤 법조빌딩이라고 기재했다. 웃음이 나왔다. ‘아, 어쨌든 기도대로 정곡빌딩 서관이구나.’
1995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처음 사건을 수임했다. 월급 개념이 아닌 수입은 난생 처음이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히 하나님의 것이니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정신없이 일했다. 당사자들을 만나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처음 5개월간은 내가 맡은 사건의 목적을 거의 달성했다.
당시 법조계에는 ‘판사들이 대부분 남자인데 여성 변호사가 어떻게 그들과 술을 마시고 로비를 하겠느냐’는 분위기가 강했다. 내 의뢰인 중에도 여성 변호사의 능력에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도 내가 일하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꿔 ‘여성이라서 일을 더 잘한다’는 소문을 내줬다.
초창기엔 사무실이 한산했지만 2∼3개월이 지나자 나와 상담하기 위해 복도까지 줄지어 앉아 기다릴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 당사자들이 정말 변호인의 충분한 변호를 받지 못하고 있구나.’ 6개월이 지나자 나는 가장 선임하고 싶은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무슨 힘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소명이 아닌가 싶다.
95년부터 2000년까지 여성변호사회 회장도 지냈다. 당시는 여성변호사가 10여명에 불과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여성 변호사로서 인정 받으며 가수 현진영,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여성 앵커 백지연 등 유명한 사건을 선임해 언론에 회자됐다. 그 즈음 동기 변호사들은 나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 “조 변호사 같은 경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여성들을 위해 정치 일선에 나서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도 안 해?”
나는 동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정치에 입문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구태여 정치권 인사들과 교류하거나 정치적 행동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거야.”
1999년 나는 정치권으로부터 새천년민주당의 발기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이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새천년민주당 발기인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16대 총선 때 나는 비례대표 23번으로 지명됐다. 정치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당선권 안에 드는 순번을 부여받기 위해 정치 실세를 찾아가 로비를 하곤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내게 그런 방법을 권유했지만 최초의 여성 검사로서, 판사 출신으로서 그렇게 정치 실세를 찾아간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례대표 23번은 당선권에 미치지 못했다. 낙선한 후 원외에 있는 정치인들의 어려움과 사정을 이해하는 시간이라 여기며 보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를 증거했다. 2001년 9월 DJP 연합이 깨지고 비례로 국회의원을 하시던 분들이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국회의원 직을 승계하게 됐다. 11월에는 서울 중곡동 예수선교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맡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기도의 위대한 힘을 믿고 그것을 체험하고 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도 새벽에 부르짖는 기도로 많은 응답을 받았다. 국회의원으로 많은 입법 활동을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성매매방지법을 제정한 것이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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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26 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