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벽돌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 앞에 놓여있는 것은 빈티지 피아노 한 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 피아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피아노 정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Play Me, I'm Yours(날 연주하세요, 난 당신 거예요)'. 베레모를 쓰고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비틀즈, 아바와 같은 올드팝 명곡의 연주를 2시간 넘게 이어갔다. 공간의 분위기, 노신사가 빚는 풍경은 옛날 할리우드 영화의 느낌을 자아냈다. 지난 22일 밤 서울 영등포구 CGV여의도점 한쪽에 마련된 '버스킹(길거리 공연) 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작은 이벤트였다.
미리 계획된 건 하나도 없었다. 피아노 한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던 이 공간을 채운 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악보도 없이 유려하게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이는 서울 동대문구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장요한(62)씨다. 전문가 못잖은 솜씨를 보였지만 음악은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몇 달 전 여기에 피아노가 있다는 걸 알고 이틀에 한 번씩은 옵니다. 영화음악을 주로 치는데 분위기가 잘 맞더라고요. 사람들 반응도 좋아서 자꾸 오게 됩니다.”
연주를 듣던 누군가는 그에게 “감사하다”며 음료수를 건넸고, 누군가는 “너무 멋지다”며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했다.
극장이 달라지고 있다. 음악과 간식을 즐기는 멀티플렉스를 넘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고, 독서 음식 쇼핑과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준다. 갈 곳 없던 시절의 ‘극장 구경’이 그저 영화를 보는 것을 의미했다면, 지금의 ‘극장 구경’은 볼거리와 즐길 거리 넘치는 문화체험이 됐다. 22∼24일 독특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서울의 극장들을 순례했다.
24일 찾은 메가박스 이수점 12층 예술영화 전용관 아트나인(ARTNINE)은 카페와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공간이다. 극장 옆에 마련된 홀 전체가 카페 겸 레스토랑 ‘잇나인(EATNINE)’으로 꾸며졌다.
아트나인은 작은 영화관이지만 잇라인은 주말이면 관객 수만큼 많은 이들이 몰린다. 주로 20∼40대들이 많이 찾는다. 의외로 남자들의 방문이 잦다고 한다. 아트나인 관계자는 “이 공간을 만든 취지는 ‘영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보자는 데 있었다”며 “주말에는 잇라인 이용객이 영화 관람객 수와 맞먹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도서관과 극장의 결합도 이색적이다. CGV명동점 씨네 라이브러리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다. 다만 그날 영화표가 있거나 CGV멤버십 VIP 또는 CGV아트하우스 회원이거나 CJ ONE 멤버십 회원의 경우 1000점을 차감하는 방식으로 이용 가능하다. 간단한 소지품을 제외한 개인물품은 전부 사물함에 맡기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만 볼 수 있다.
씨네 라이브러리는 오로지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양쪽 벽면을 1만권의 도서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영화 원작, 영화 전문서적, 국내외 시나리오, 미술·사진·건축·디자인 관련 서적, 세계 문학 고전, 인문·예술 분야 베스트셀러 등이 구비돼 있다. 혼자 앉아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테이블 하나에 의자 하나씩 배치돼 있다.
22일 오후 1시30분쯤에는 20대 여성 3명이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독서를 즐겼다. 때때로 이 곳을 찾는다는 백모(28·여)씨는 “영화를 보지 않을 때도 가끔씩 온다. 올 때마다 2시간 정도 머문다. 조용하고 책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주말에는 1시간에 10∼15명 정도가 몰린다. 직원 정모(28)씨는 “단골들도 꽤 있다. 단골은 주로 혼자 오는 분들이다. 오며가며 들른 커플 고객도 많다”고 했다. 인기도서는 영화와 관련한 원작 또는 마블 코믹스의 그래픽노블이라고 한다.
버스킹이 펼쳐지는 극장이 또 있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이다. 24일 오후 5시30분쯤엔 스트리트 퍼커션 듀오 ‘피블로 듀오’와 비보이 ‘고릴라 크루’가 함께 무대를 꾸몄다. 4살 딸과 함께 공연을 지켜보던 김모(37)씨는 “지나가다 리듬이 흥겨워서 걸음을 멈췄다. 아이가 좋아하니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극장이라는 공간의 변신으로 극장에서 또 다른 재미를 찾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카페로 도서관으로… 극장의 변신은 무죄
입력 2016-04-26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