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판 집단지성’ 변치않는 하모니

입력 2016-04-25 18:17
개방과 폐쇄의 특성을 가진 반투명유리판이 설치된 1존의 전시전경.
비둘기 조각이 거대한 동상처럼 자리한 3존.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현대사의 ‘8말9초(80년대 말 90년대 초)’는 동구권 붕괴와 여행 자유화로 대표된다. 개방을 타고 현대미술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유입됐다. 회화와 조각 등 장르 간 구분이 엄격했던 모더니즘의 벽을 깨부수는 ‘뮤지엄’ ‘사과나무’ 등 소그룹 활동도 활발했다. 이들은 미술, 음악, 출판, 이벤트, 놀이가 결합된 일종의 종합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형주(53)는 훗날 미술계의 스타 작가가 된 이불, 최정화 등과 함께 뮤지엄에서 활동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사였다. 이후 영화 ‘형사’로 2006년 대종상영화제 미술상을 받는 등 미술계 밖에서 더 활발했던 그가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망상지구(패러노이드 존)’ 전에서다. 그가 감독역할을 한 총체예술적 협업 프로젝트이다. 음악, 사진, 조명, 영상 등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함께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도둑들’ 등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던 달파란(50), 2015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품 ‘축지법과 비행술’ 음악 작업을 했던 오영훈(45), 안은미컴퍼니의 조명디자이너 장진영(49),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를 넘는 사진작가 윤석무(44), 마르세이유 라프리벨 드 마리 미술관 등 해외에서 개인전을 더 많이 한 김세진(45) 등 9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25일 전시장에서 만난 이 작가는 참여한 협업 작가들에게 뭘 주문했느냐는 질문에 화들짝 손사래쳤다. “협업에는 주문이 없어요. 제안이 있을 뿐이지요.” 각 분야에서 콜라보레이션(콜라보)이 대세다. 미술에서도 왜 콜라보일까. 포스트모던이 융합을 내세우고 있지만 과거에는 작가 혼자서 회화, 영상, 설치까지 모든 걸 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시각적 정보는 넘쳐난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집단지성이 요구된다”고 설명했다.

전시 주제는 ‘망상’이다. 세월호 침몰, 아동학대 등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한국이다. “이런 세상은 욕망이 낳은 망상이 켜켜이 쌓인 것이며 우리는 그런 망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관 전시에 대한 통념을 180도 뒤집는다. 4개 전시 존의 각각 장면이 다른 무대예술로 초대하는 것 같다. 시각이 아니라 청각과 촉각 등 오감을 사용하며 체험하는 전시다.

세로로 길게 자른 반투명 유리판이 파티션처럼 공간을 구획하거나 처녀귀신의 긴 머리채를 연상시키는 검은 천이 늘어뜨려진 전시 공간이 뭔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하이라이트는 3존이다. 천장이 높은, 사방 흰색의 확 트인 공간에 거대한 비둘기 조각이 동상처럼 서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는 망상의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작가는 “비둘기는 숭고, 평화의 상징이지만 이제는 퇴치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리 삶이 그렇다”고 말했다. 7월 17일까지(02-3701-9557).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