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재호] 댓글에 쿨한 대통령 기대한다

입력 2016-04-25 17:28

“언론이야말로 국민과 정부와 국회를 잘 이어주는 소통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4월 24일 46개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초청 오찬간담회 모두발언에서 한 말이다. 취임한 지 2개월 된 당시 박 대통령의 언론관이라 할 수 있겠다. 박 대통령은 2시간 동안 오찬하면서 2만자 분량의 답변을 쏟아냈다. 그의 언론관을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는 발언들도 이어졌다. 취임 초 지지율이 40%대로 급락한 것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다.

“떨어진 것 저도 봤다. 언론의 칼럼도 보고 기사도 보고 요즘 인터넷도 들어가 보면 기사 밑에 여러 가지 평을 한 댓글도 있고 볼 게 엄청나게 많다.” 박 대통령은 “그런 것이 다 국민들의 생각”이라며 “당연히 그런 것은 관심 있게 봐야 하는 것이고 참고할 부분이 많이 있다”고 했다.

하루 24시간 일과를 분 단위로 쪼개도 모자랄 대통령이 댓글을 보고 참고하다니, 필자에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래서 가히 ‘인터넷 폐인’이라 불릴 만하다고 반어적 비평을 했던 기억이 난다. 미리 준비한 특유의 ‘썰렁 개그’로 오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매일 마감시간에 쫓기는 언론인들의 애환을 어루만져준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김행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고은 시인의 시집 ‘순간의 꽃’ 중에 ‘밥’을 노래한 시(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어라)를 낭송해 대통령이 마련한 ‘사랑의 오찬’임을 강조했다. 국정 최고책임자와 소통의 첨병들이 밥 먹으면서 국사(國事)를 논하는 자리에 웃음과 유머가 곁들여졌으니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 정치부장단 만찬과 출입기자 오찬, 논설실장 오찬 등 릴레이 초청 간담회가 한 순배 돌아간 다음 ‘흔하디 흔한 것’은 사라졌다. 무슨 속사정이 있었기에 언론과의 불통 담벼락을 쌓았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등으로 정권이 휘청거렸던 기억만 뇌리에 아른거린다.

이 기간 청와대와 언론의 관계는 암흑기 그 자체였다. 복지부 장관 퇴진 과정의 의혹과 세월호 분향소 조문 연출 의혹을 제기한 언론사들이 줄줄이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메르스 사태 땐 정부광고를 무기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고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을 보도한 신문사 사장은 “청와대 압력으로 해임당했다”며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내기도 했다.

어디 이뿐인가. 청와대는 일본 극우신문의 인터넷 칼럼을 법정으로 끌고 갔다가 무죄로 판결 나 국제적 망신을 산 바 있다. 이 사달은 국내 한 신문이 세월호 참사 당일 의문의 대통령 행적과 사생활 관계에 대한 시중의 소문을 칼럼에 옮긴 데서 비롯됐다. 하지만 이 신문은 놔두고 칼럼을 재인용한 일본 칼럼만 문제 삼은 것은 균형을 잃은 처사다. 마치 유승민 의원을 ‘배신의 정치’로 몰아 내친 것처럼 ‘배신의 언론’을 염두에 둔 작전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마저 든다.

20대 총선은 끝났다. 국민은 언론과 국회를 적으로 삼은 청와대를 심판했다. 총선 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30% 이하로 추락했고 새누리당 총선 참패의 주원인은 대통령의 불통(25.0%)으로 조사됐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국민의 민의가 무엇인지’는 제시된 셈이다. 고은 시인의 시집에는 ‘친구를 가져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란 시도 있다. 박 대통령이 26일 주재하는 편집·보도국장 초청 오찬간담회는 장난이 아니라 현실이다.

정재호 편집국 부국장 jaeho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