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경제’가 만든 21세기 新카스트
입력 2016-04-25 04:00
세계 3대 크루즈 선사인 ‘노르웨이 크루즈 라인’은 최근 4200명을 태울 수 있는 새 배를 취항했다. 그런데 이 배에는 특급승객 275명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다. 일반승객은 접근도 못하는 곳이다. 특급승객에게는 24시간 집사 서비스, 룸서비스, 개인 풀장, 전용 레스토랑, 선탠시설이 제공된다. 거기에 더해 배 안에서 공연이 펼쳐지면 언제 가도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되고,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가장 먼저 내릴 수 있는 특권도 주어진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3일(현지시간) 이 배를 소개하면서 “지금 같은 ‘특권경제의 시대’에는 한 배를 탔다고 모두 같은 배를 탄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NYT에 따르면 소수의 특권층 또는 부유층을 겨냥한 서비스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 가령 미국 애틀랜타와 뉴욕의 국제공항에는 터미널로 갈 때 럭셔리 자동차 포르쉐에 태워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 디즈니랜드는 지난달부터 일반인이 없는 시간대에 소수의 부자만 놀이기구를 즐길 수 있는 서비스를 개시했다. LA국제공항은 부자를 위한 1800달러(205만원)짜리 초특급 수속 서비스를 도입했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는 부모가 레저를 즐기는 사이 자녀들이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수달, 상어, 바닷새에게 모이를 주는 최고급 생태체험이 성행 중이다.
중미의 섬나라 아이티에서는 선별된 이들을 위한 ‘개인 휴양용 리조트’ 서비스에 이어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을 위한 ‘초특급 리조트’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른바 ‘VVIP 서비스’다. NYT는 “세계 곳곳에 돈으로 빚어지는 신(新)카스트 제도가 넘쳐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보스턴컨설팅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전 세계 부자들이 쓴 럭셔리 관련 소비액은 우리나라 한 해 예산(380조원)과 맞먹는 3510억 달러(약 351조원)다. 여행, 리조트 체류, 스파와 같은 럭셔리 체험 분야에 1350억 달러(약 154조원), 럭셔리 자동차에 1050억 달러(약 120조원), 명품백이나 시계 구입에 400억 달러(약 46조원), 예술작품 수집에 270억 달러(약 30조원)가 쓰였다.
소수 부자를 위한 서비스는 갈수록 확대될 전망이다. 전 세계 대부분 나라에서 부자는 점점 더 큰 부자가 되고, 돈을 더 많이 쓰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2003∼2012년 상위 5% 부자의 소비액은 35% 증가했지만 나머지 사람의 소비는 오히려 10% 줄었다.
특권문화 확산을 놓고 업계에서는 “세상이 사회적 격차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며 별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부자가 비행기 1등석 비용을 부담하기에 일반인이 저렴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처럼 모두에게 혜택이라는 논리도 나온다. 심지어 미국 로열 캐리비안사는 크루즈에 일반인이 소수 특권층의 공간을 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부러움’을 서비스에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예일대 베리 네일리버프 교수는 “특권문화 확산은 일반인과 부유층 모두를 불편하게 할 것”이라며 “일반인의 시기가 커질 수 있고, 부유층 역시 일반인의 시선 때문에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경제 시스템이 온통 부자를 위해 돌아가니 일반인을 위한 서비스가 줄어들거나 제품개발이 소홀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