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현미] 86코 28물결무늬

입력 2016-04-24 18:01

지난겨울 국제 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코리아의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 캠페인에 참여했었다. 자발적인 참여는 아니었지만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전해질 모자를 뜨면서 엉킨 실타래 같은 마음이 단정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지난주에는 겨울옷을 정리하다가 코가 풀린 초록색 목도리를 발견했다. 몇 년 전 아르바이트 틈틈이 한 코 한 코 정성들여 뜬 초록색 목도리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하던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부하며 아르바이트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한 코 한 코 뜬 정성이 갸륵해서 그해 겨울 내내 그 목도리를 매일매일 하고 다녔던 기억도 떠올랐다. 사랑받아본 사람은 안다. 살면서 사랑받았던 느낌이 얼마나 크게 나를 살리는지.

86코 28물결무늬, 코 86개를 만들고 물결모양 28개를 뜨는 일. 요새는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라디오를 틀어놓고 뜨개질을 한다. 지혜의 초록색 목도리는 곧 아프리카 신생아의 목숨을 지켜주는 초록색 모자로 변신할 것이다. 1개의 목도리가 3개의 모자로 재구성될 것이다. 그 겨울 내 목을 따뜻하게 감쌌던 지혜의 사랑은 이제 아프리카 신생아의 머리를 포근하게 감싸줄 것이다. 사랑을 줘본 사람은 안다. 살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크게 나를 살리는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듯, 사랑도 자전하고 공전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등한 삶의 방식을 꿈꾸는 일은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각자 할 수 있는 나눔을 서툴고 소소하더라도 바로 지금 실천하는 데서 온다고 믿고 있다.

평생을 살면서 아프리카를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갈 수 없는 곳은 없다.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고 어떤 시인이 말했듯 우리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잊지 마세요’가 아니라 ‘너를 잊지 마세요’라는 말 속의 깊은 사랑을 발명하러 왔다고 믿고 있다.

안현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