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배숙 <6> 사법시험 앞두고 교회 목사님 꿈에 나타나

입력 2016-04-24 20:29
조배숙 당선자는 검사로 근무하다가 1986년 판사로 전관했다. 92년 서울지법 남부지원(현 서울남부지법)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조 당선자.

김홍섭씨는 법조인이면서 성자와 같은 생활을 하셔서 존경을 받는 분이었다. 청빈했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인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때도 ‘법관으로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선고하지만 인간으로서는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려 법정이 울음바다가 된 일화도 있다. 그분이 남긴 글을 모은 책 표지에는 법모를 쓰고 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이 뇌리에 남아 있어서였을까. 꿈에 김홍섭씨가 나타났다. 그분의 표정은 엄숙하다 못해 무서워 보였다.

그분께서 내게 법복을 건네주셨는데 법복을 받아보니 ‘검사 조배숙’이라고 쓰여 있었다. 조금 지나니 ‘판사 조배숙’으로 쓰여 있었다. 지금도 그 꿈이 생생하다. 내가 법조인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예시였다.

나는 더욱 기쁜 마음으로 공부했다. 내 일생에서 그렇게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겨울에는 도서관 난방이 되지 않아 몹시 추웠다. 하루는 너무 추워 울면서 공부하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친구가 준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저 십자가에 못 박혀 그 참혹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이 정도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라며 위로했다.

드디어 사법시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또다시 꿈을 꿨다. 내가 다니던 남현교회 목사님이 꿈에 나타났다. 긴 막대기에 조롱박이 달려있었고 그것으로 기름을 떠서 내 머리에 붓는 꿈이었다. 기뻤다. 그리고 시험기간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민사소송법 책을 한 번 읽으려면 최소 두 달이 걸렸는데 반나절 만에 일독을 했던 것 같다. 예상문제도 많이 적중했다.

시험이 끝났다. 거의 탈진상태가 됐다. 이제 합격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반이 지나고 1980년 사법시험 22회 합격자 명단이 발표됐다. 나를 포함해 여성 합격자가 3명 있었다. 서울대 법대 대학원 2학년 시절인 24살이었다. 지금은 사법시험에 여성 합격자가 많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다. 덕분에 언론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인터뷰도 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사법시험 합격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나에게 주신 이 직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겠다.’ 나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며 믿지 않는 가족을 위해 중보기도에 들어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절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족들이 절로 향했다. 내가 사법고시를 보던 그해 사월초파일에는 어머니가 나의 합격을 기원하며 일천배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진리를 체험한 나로서는 가족의 구원을 미룰 수 없었다.

내가 교회에 나가고 난 뒤 우리 집안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가 두통에 시달리며 잠을 못 이루고 산책을 다니곤 하셨는데 우연히 나와 새벽기도를 가셨다가 은혜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그날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불교신도였던 어머니에게 전도하셨다. “여보, 이제 배숙이와 함께 교회에 갑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선 부부가 교회에 나가야 하지 않겠소?” 자연스레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1991년 별세하실 때까지 익산 성산교회에 출석하셨다. 교회에선 교회 설립 후 최초로 교회장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교회 건축과 어려운 신학생 학비 지원에 앞장섰다. 물론 생전에는 가족에게 일절 내색하지 않으셨다. 1982년 사법연수원 생활을 무사히 마친 나는 임숙경 검사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검사로 임관했다.

정리=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