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기억의 뒷모습

입력 2016-04-21 17:31

며칠 전 실수로 스마트폰에 저장돼 있던 사진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착각의 ‘확인’을 누르자마자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삼백여 장이 넘는 사진이 사라졌다. 어떤 거리의 풍경, 어떤 날씨의 상태, 어떤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지워졌다. 잠시 어리둥절했다. 휴대전화 속에 사진이 저장돼 있을 때는 당연히 내 머릿속에도 어떤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더니, 사진이 지워지자 그것도 깨끗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기억한 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토머스 드 퀸시는 아편에 취한 상태를 설명한 책에서,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체험을 했다고 썼다. 어쩌면 사람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고스란히 잊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뇌는 그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지만 그것을 의식 위로 꺼낼 방법을 찾지 못해서 기억해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언어로는 되살리지 못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되살릴 수 있는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사람이 모든 경험을 저장하고 있다면 한 번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지나쳐 온 모든 거리들을, 지나쳐 간 모든 시간들을 아득한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을 것이다. 차곡차곡 아니라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쌓여 있어서 꺼내지 못하는 것일 뿐. 어쩌면 겹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주 마주친 얼굴 한 둘은, 마치 유리창 저편에 있는 그림자처럼, 머릿속에 흐릿하게 띄워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리에서 그 얼굴과 스치게 되면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뒤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사라지는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볼지도.

깔끔한 검은색의 무(無)로 변한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사진들은 뒷모습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 수 없으며, 지우고 싶은 것만 지울 수도 없다. 지운 줄 알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르는 기억도 있고. 사람의 기억과 기계의 기억은 그렇게 다르다.

부희령(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