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공개한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를 두고 논란이 뜨겁습니다. 한국에서도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씨 등 196명이 조세회피처 페이퍼컴퍼니 보유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탈세정보교환센터(JITSIC) 소속 35개국 세무 당국은 파나마 페이퍼스 관련 자료를 공유하는 등 역외탈세 문제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는데요. 한국 국세청도 이에 협조합니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올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동안 조세회피처 문제로 국제사회가 몇 차례 협의를 가졌지만 조세회피처를 근절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이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조세회피처 문제는 결국 다른 나라보다 세금을 덜 걷는 나라가 있어서 생깁니다. 그런데 세금을 덜 걷는 건 해당 국가의 고유 주권입니다. 세계정부가 없는 이상 다른 국가의 조세정책에 강제적으로 개입하는 건 어렵습니다. 조세회피처가 협조하지 않으면 정보 공유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들이 활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타국에 기업을 세웠다는 이유만으로 기업인을 제재할 수도 없겠죠. 합법적인 세금 절약인지 사기성이 짙은 불법 탈세인지 경계도 모호합니다. 실제 권 회장은 서울고법 2심에서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 탈세로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대부분 탈세 혐의에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데니스 힐리 전 영국 재무장관은 탈세와 조세회피를 ‘감옥 담장 두께 차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는 “혜택을 주는 본국에 세금을 내라”고 압박하고, 기업인은 “기업 활동을 해외에서 하니 못 내겠다”고 반박하는 상황은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최초의 조세회피처는 미국?=말 많고 탈도 많은 조세회피처는 언제 어떻게 처음 생겨난 걸까요. 최근 조세회피처 규제에 미국·영국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조세회피처의 기원은 이 두 나라라는 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영국 런던시티대학 로넌 팰런 국제정치경제학과 교수는 초기 조세회피처의 기원으로 19세기 후반 미국 뉴저지와 델라웨어를 꼽습니다. 당시 조세회피처는 낮은 세율보다는 회사 설립에 규제를 두지 않는 식으로 뉴욕의 부유한 회사들을 끌어왔습니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부부가 델라웨어주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죠. 국제 경제학자들은 대영제국이 식민지 지역 엘리트 관료들을 적은 비용으로 통제하려고 조세회피처 정책을 활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현재 대부분 조세회피처도 영국령에 속해 있습니다.
20세기 초반 비밀계좌 개념이 스위스에서 처음 생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스위스 은행업계에서 유대인의 재산을 1930년대 독일 나치 정부에서 보호하려고 비밀계좌를 도입했다는 겁니다. 스위스는 1934년 은행 직무와 관련된 비밀유지를 골자로 하는 은행비밀보장법을 제정했습니다. 출처가 불투명한 세계 각국의 자금이 몰리면서 스위스는 오랫동안 ‘검은돈의 천국’이라는 오명을 들었습니다.
조세회피처는 20세기 후반 본격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1998년 ‘유해한 조세경쟁’이라는 보고서를 출간해 조세회피처 비판에 불을 지폈습니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빌 클린턴이 당선되는 등 1990년대 초 주요 선진국에 좌파정부가 집권하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복지 정책에 필요한 세금 확보를 위해 역외탈세 근절에 나선 겁니다. 당시 보고서는 조세회피처가 다른 국가의 과세 기반을 잠식하고, 무역과 투자 패턴을 왜곡하며, 글로벌 복지 수준을 하락시키는 한편, 조세 시스템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조세회피처들은 약소국에 대한 주권 침해라고 즉각 반발했습니다. 일부 조세회피처가 정보공개 등에 동의하기도 했지만 근본 해결책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국제기구 차원에서 개별 주권국을 제재하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21세기 들어 아마존, 애플, 구글과 같은 다국적 기업들의 조세회피 행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조세회피처를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다시 힘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2012년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조세회피처를 활용한 세원잠식(Base Erosion)과 소득 이전(Profit Shifting)을 방지하자는 합의를 했습니다. 스위스도 유럽연합(EU)과 금융정보 교환과 관련된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습니다. 홍익대 김유찬 세무대학원 교수는 “조세회피 규제가 국내 세법이나 국제규범으로 수용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 부분이 제대로 진행될 거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국제 테러 자금 저수지 의혹?=조세회피처는 세금을 거의 걷지 않는 대신 기업 설립 시 면허나 등록비용을 부담하게 합니다. 조세회피처에는 ‘영원한 여행자(permanent tourists)’로 불리는 자산가들이 몰리기도 합니다. 독일 국적인 포뮬러원(F1) 선수 마이클 슈마허는 1996년 스위스로 이주해 소득이 전혀 없는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조세혜택을 받았었습니다. 한 국제경제학자는 “영원한 여행자를 위한 거대한 비즈니스가 존재한다. 이들은 레이더 밑에서 움직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세회피처는 최근 탈세의 온상이라는 지적 외에도 국제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 행위의 ‘자금 세탁소’라는 의혹도 받고 있습니다. 테러자금이 조세회피처의 느슨한 규제망을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도 전 세계 금융체계와 감독제도를 재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파나마 페이퍼스’ 자료 공개가 조세회피처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입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슬로 뉴스] 돈세탁… 역외 탈세… ‘검은돈의 도피처’
입력 2016-04-21 17:21 수정 2016-04-22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