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고승욱] 오뎅과 우동이 뭘 잘못했다고

입력 2016-04-20 17:41

쉬는 날에는 아이들과 어묵꼬치를 자주 먹는다. 가게에서 산 국수장국을 물에 타 끓이고 어묵과 삶은 계란을 넣으면 된다. 만드는 시간은 5분 남짓. 그래도 맛은 어지간한 동네 떡볶이집에 견줄 만하다.

글은 이렇게 썼지만 음식을 만들면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조금 다르다. “오뎅 만들자. 굉장히 간단해. 물에 가쓰오부시 국물 타고, 끓으면 오뎅과 계란 넣어서 익히면 끝이야. 냉동실에 스지(筋·소 힘줄)가 남았으면 좋겠는데. 국물에 우동 사리 말아 먹자.” 신문에 이렇게 쓰면 곤란하다. 항의전화가 빗발친다.

TV에선 ‘먹방’과 ‘쿡방’이 대세다. 그런데 나오는 사람마다 홍길동이다. 오뎅을 오뎅이라 부르지 못하고 우동을 우동이라 칭하지 못한다. 스키야키(すき燒き)는 일본식 전골이라고 돌려 말해야 한다. 돈가스(豚カツ)가 살아남은 게 신기하다. 국어사전은 돈가스를 ‘돼지고기 너비튀김’으로 바꿔 쓰라고 권한다. 스파게티와 똠양꿍은 그 나라 말을 쓰면서 오뎅 스키야키를 굳이 우리말로 바꿀 이유는 없지 않을까.

‘오뎅’을 먹고 나서 TV 앞에 앉으면 같은 일이 벌어진다. 즐겨보는 만화채널에서 ‘소년탐정 김전일’의 주인공 전일이가 나온다. 이것도 이상하다. ‘긴다이치 쇼넨노 지켄보(소년 긴다이치의 사건파일)’라는 일본 만화의 주인공은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金田一耕助)의 손자 긴다이치 하지메(金田一一)다. 굳이 따지자면 ‘김전일’은 성(姓)인데 우리나라에서 성은 김씨고 이름이 전일이인 고등학생이 됐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재미있게 봤던 만화영화 ‘날아라 태극호’가 후지TV에서 방송된 ‘타임보칸’이라는 것은 어른이 돼서 알았다. 축구 한일전에서 ‘기운 센 천하장사’를 응원가로 부르다가 망신당했다는 에피소드와 함께 들었다. 하필이면 태극호라고 했는지 아쉬웠다.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말이 얼마나 많은 일본어로 오염됐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신문사 편집국에서는 아직도 이런 소리가 나온다. “야마를 잘 잡으란 말이야. 기자는 야마가 생명이야.” “온라인에는 마루사진 크기 확인하고 보내야 돼.” “사스마와리 수습은 언제부터 하리꼬미 시작하지?” 더럽혀진 한글을 깨끗이 하고, 잘못된 언어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사람이 노력했다. 덕분에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한글을 쓰고 있다. 물론 갈 길은 아직 멀다.

아팠던 일은 많았지만 시간은 흘렀다. 우리를 짓눌렀던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과거에 그랬던 옛이야기가 됐다. 굳이 일본 만화영화를 우리 것인 양 뒤섞어 보여주지 않아도 우리 어린이들은 우리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독립군을 밀고하는 친일파이기에 이자카야(居酒屋)에서 사케(お酒·청주)를 마시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이웃나라의 문화를 즐기는 풍족함과 여유로움이 있다.

일본 음식과 애니메이션을 운운하는 것은 며칠 전 터진 일본 지진 때문이다. 40명 넘게 숨졌고 20만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고통받고 있다. 골든타임은 지났지만 필사적인 구조작업도 계속되고 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무력한 인간을 다시 느낀다. 무너진 건물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한 가족을 애타게 찾는 노부부의 사진 한 장에 가슴이 먹먹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웃의 슬픔에 너무 냉담하다. 지진 소식을 담은 기사 아래 달린 댓글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 드라이브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하는 파렴치한 태도가, 과거의 잘못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터이다. 그래도 생명 앞에서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사람의 도리다.

고승욱 국제부장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