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배숙 <4> 사법시험 낙방으로 힘들 때 신앙 처음 접해

입력 2016-04-20 17:39
조배숙 당선자(왼쪽 세 번째)가 서울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7년 전북 이리(현 익산)의 고향집을 방문해 부친(맨 왼쪽) 등 가족들과 함께했다.

경기여고 입학 후 공부를 못하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재수할 때만 해도 쾌활했는데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친구들은 다들 ‘수학의 정석’을 붙들고 있었다. ‘왜들 벌서부터 대학입시를 고민하며 야단인지 모르겠네.’

공부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은 32등을 맴돌았다. 한번은 31등을 해서 ‘등수가 올랐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한 친구가 아파서 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의 책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전혜린의 세련된 문체와 유려함, 젊은이를 매혹하는 이상에의 열정, 엄청난 독서량 등이 나를 매혹했다. 고등학교 선배라는 사실이 그녀를 한층 더 가깝게 느끼게 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으며, 독일 유학 후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혜린은 우리의 우상이었다.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갑자기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험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그러자 성적이 4등으로 뛰어올랐다. 갑자기 선생님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리(현 익산)에서 아버지가 하시는 극장이 크냐? 그런데 왜 부모님이 학교에 한 번도 안 오시냐?” 부모님은 자녀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다 컸기 때문에 찾아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부모님은 졸업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기여고에 오셨다.

방학이 되면 고향인 이리로 내려갔다. ‘제인 에어’ 등 책에 몰두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책부터 찾았다. 밤에 잠을 자기가 아까울 정도로 책을 읽었다. 소설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2학년이 돼서 시험을 치렀는데 다시 30등으로 추락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왜 그리 비참하게 느껴지던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예습과 복습을 철저하게 했다.

고3이 됐다. 오전 7시40분에 첫 수업을 시작해 10교시 수업을 마치면 저녁 7시쯤 됐다. 하루 5시간만 자면서 공부했다. 그때는 대입을 앞두고 상당히 긴장했다. 그때의 강박관념이 남아서 그런지 지금도 가끔 고3 때 꿈을 꾼다. 그렇게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며 열심히 공부한 끝에 1975년 마침내 서울대 인문대학에 진학했다. 사회계열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은 안전하게 가자고 했다. 그렇게 인문계열로 진학했지만 아버지는 내가 법대에 가길 원하셨다. 다행히 인문·사회계열을 통틀어 1등을 해서 법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법학은 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교재에 한자도 많이 나와 읽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6개월 정도 지나니 익숙해졌다. 사법시험은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대학교 2학년 말에 별 준비 없이 시험 삼아 치른 사법시험 1차에서 너무 쉽게 합격한 것이 화근이었다. 3학낸 때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2차 시험에 응시했으니 합격할 리 만무했다.

대학 4학년이 돼 1차와 2차를 동시에 준비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4년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고민을 한 뒤 무엇인가 자신 있게 준비해서 사회에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 4년을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나는 극도의 우울함과 불안감에 빠졌다. 같이 시험을 치른 후배들은 모두 합격했는데 나 혼자만 사법시험에 낙방해 더욱 힘들고 외로웠다. 그 힘든 시절, 나를 지탱해준 것은 친구 소개로 접하게 된 신앙의 힘이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