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업체 ‘뒷짐’ 정부 ‘뒷북’… 엄청난 후유증
입력 2016-04-19 21:27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11년 4월 중증 폐렴 증세를 보이는 임신부 입원환자가 급증하면서 알려졌다. 그해 1월부터 5월까지 총 8명의 중증 폐질환 환자가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모두 원인을 알 수 없었고, 유사한 폐질환에 쓰이는 약물치료법은 듣지 않았다. 결국 산모 4명이 사망하면서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에 나섰다.
◇5년간 매번 ‘뒷북’ 정부…피해 키웠다=질본은 2011년 8월 31일 원인불상 폐 손상이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살균제 사용 및 출시 자제를 권고했다. 그럼에도 관련 제품들은 마트 등에서 버젓이 팔렸다. ‘옥시싹싹’ 등 6종의 제품 수거명령을 발동한 것은 3개월이 지나서였다. 질본이 폐질환을 유발한 위험요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지목한 때였다.
정부는 피해자 파악에도 소극적이었다. 이듬해 5월 보건복지부가 피해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할 때까지 정부의 공식 피해자 집계 수는 34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환경보건시민센터(이하 시민센터)가 자체 접수한 피해신고는 이미 350건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2014년 3월에서야 정부는 1차 피해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361건이 접수됐고, 이 중 인과관계가 확실하거나 가능성이 높다고 판명된 사례가 168건이었다. 이듬해 4월 2차 발표에선 접수된 169건 중 관련 사례가 49건이었다. 지난해까지 접수한 3차 피해신고는 더 불어난 752건에 이른다. 시민센터 임흥규 팀장은 19일 “전체 피해 의심사례는 1500건을 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불어나도 업체들 ‘나 몰라라’=제품을 생산한 업체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 정부는 2012년 7월 허위과장 광고를 문제 삼아 옥시레킷벤키저에 5000만원, 홈플러스 100만원, 버터플라이이펙트에 1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안일한 대처에 분노했다. 그마저도 롯데마트 등은 경고처분에 그쳤다.
제품 원료를 공급한 SK케미칼이 살균제 원료의 흡입독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보고서 내용 등이 공개되면서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옥시 대표 샤시 쉐커라파카는 “인도적 차원에서 기부금 50억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다른 제조업체도 법원의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며 책임회피로 일관했다. 그나마 롯데마트가 18일 공식 사과문을 내고 피해자 보상금 100억원을 마련하겠다고 나선 것이 유일한 사과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해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검찰이 5년 만에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자 피해자들은 지난 2∼3월 옥시·롯데·홈플러스·애경·SK케미칼·이마트 등 전·현직 임원들을 무더기 고발했다. 일부 피해자는 옥시와 롯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해 일정 금액에 합의하기도 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초기에 기침으로 시작했다가 폐가 딱딱해지는 폐섬유화가 진행되면서 호흡곤란 증상을 겪었다. 증상이 심한 경우 폐 이식 수술을 받거나 사망한 사람도 잇따랐고, 상당수는 호흡 보조장치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